뱃속의 아기는 엔돌핀 샤워를 하며 느긋하게 수영을 즐기고 있었으리라. 아차, 신성일이 몇 년 전 한 방송에서 고백했듯이 이들의 ‘속도위반’은 비밀연인에서 벗어나는 RPM 수치를 확 끌어올려주었을 터. 훗날 장동건-고소영 커플도 이들의 계보를 잇는다.
40여 년 후. 누가 알았겠나. 개미허리처럼 낭창낭창하던 엄앵란이 케이에프시 할아버지를 연상하게 만드는 푸근한 인상으로 아침방송에 나와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게 될 줄. 어느 날 TV에서 본 엄앵란은 산전수전 다 겪은 막걸리 주막의 주모 같은 포스로 결혼과 생활과 현실에 대해 훈수를 두고 있었다. 곱게 늙은 여배우들도 많건만. 왕년의 여배우 이미지를 상실한 모습에서 실망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엄앵란은 당당했다. 두둑한 뱃살도 걸쭉한 목소리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신성일은 여전히 매력이 넘쳤다. 저 물 건너 헐리우드에 사는 은발의 숀 코너리처럼. 대머리도 아닐뿐더러 얼굴의 주름까지도 유려한 곡선을 이루며 연륜의 깊이를 더해줬다. 이건 뭔가 불공평하다. 더 불공평한 건 칠순이 넘은 신성일은 과거의 불륜 사실을 줄줄이 늘어놓는데 엄앵란은 아침 방송에서 울고 짜는 주부들에게 이러는 거다. 남자는, 세상은 다 그러니 연연해하지 말라고.
전국의 어머니들은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엄앵란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쿨했다. 남편 신성일이 “내가 진정 사랑했던 여인은 김영애”라며 아내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도 이 여인은 “그래도 이혼은 안해”라며 간단히 사태를 제압해버렸다. 이건 뭐, 사춘기 아들의 도발을 잠재우는 엄마의 모습? 엄앵란은 분노의 역류를 다스리며 눈 하나 꿈쩍 않는 내공을 보여줬다.
“김영애가 내 아이를 낙태했다.” 신성일의 철 지난 고백은 아마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 아이를 떠나보내며 남은 응어리를 끊어내는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엄앵란은 이미 신성일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둔 ‘위너’였지만 저런 발언에 속 편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며칠 전 아침방송에 딸과 출연한 엄앵란은 딸이 가져온 골동품을 보며 “그때 거잖아. 영화 '이별' 찍을 때. 그때 신성일 김영애랑 가서 산 거잖아.” 카메라 앞에서 태연하게 남편의 불륜을 언급했다. 이를 보고 난처해하는 딸의 모습에 엄앵란은 “아름다운 추억이 담겨 있는 건데 왜 인위적으로 미워하냐”며 되레 딸에게 핀잔을 주었다.
2007년 정치인으로 변신한 신성일은 돈 문제로 구속을 앞둔 시점에 외국에 나가 있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는 “엄앵란이 국내에서 떳떳하게 활동해야 한다. 아내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데 그럴 순 없다”며 제안을 뿌리쳤다고 한다. 엄앵란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일흔의 남편을 광복절 특사에 포함시켜 달라”며 정치인들에게 호소문을 보냈다. 대한민국 ‘세기의 커플’ 엄앵란-신성일은 보통 부부와 다른 의리와 사랑이 있다.
신성일의 불륜 고백에 ‘쏘쿨’한 엄앵란은 체념보다 깊은 포용력을 보여줬다. 자신을 좀 먹는 상처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열정의 여인. 엄앵란은 피부는 노화되어도 마음은 재생이 계속된다. 케이에프시 할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엄앵란의 마음만은 탱탱하니까.
김수현 기자 penpop@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