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년 2월27일 4대 그룹 총수와 함께한 오찬에서 김대중 대 통령이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당시는 DJ가 재벌개혁의 ‘칼’을 높이 쳐들던 때였다. 그러나 2년 후 개혁의지는 스러진다. | ||
이 자리에서 DJ는 “김 전 수석은 재경부 장관을, 정 교수는 청와대 경제수석을 각각 맡아달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수석은 “7년 이상 현직에서 멀어져 있어서 감각이 떨어진다”면서도 “정 원하신다면 인사권을 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이 두 사람은 대표적 경제개혁론자로 꼽혀왔던 인물들이었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인 김 전 수석은 6공화국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내면서 재벌의 문어발식 기업운영 해체 및 상속세 강화를 통한 재벌세습 방지 등을 추진하다가 낙마했었다. 집권 초부터 ‘가열차게’ 재벌개혁을 밀어붙여 왔던 DJ가 중반기를 넘기면서 새롭게 ‘개혁 쌍두마차 체제’를 구상했던 것이다.
한 여권 핵심인사는 DJ의 구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DJ는 98년 초유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벌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99년 8·15 광복절 치사 이후에는 재벌 소유구조에 대한 일대 수술을 단행했다. ‘대마불사’라는 신화에 의존해 버티던 대우그룹까지 해체하고 김우중 회장을 퇴장시켰다. 이 같은 혁명적 개혁은 시대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업과 보수세력이 DJ를 두려워했고 국민들은 DJ의 개혁노선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권 중반을 넘기면서 ‘개혁 피로감’에 대한 여론이 꿈틀대고 이 틈을 탄 재벌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개혁드라이브를 늦추지 않으려면 확고한 개혁마인드를 가진 경제팀이 필요했다.”
실제로 정권 초기에도 DJ는 정 교수에게 한국은행 총재직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고, 이후에도 청와대 수석을 제의하면서 김종인 전 수석과의 동반입각을 조건으로 달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경제부처의 한 고위관계자는 “새 경제팀의 첫 과제는 현대그룹 해체가 될 것이다. 현대 해체가 무난히 마무리되면 이후는 재벌그룹 전체가 대상이 될 것이다. 향후 2∼3년 내에 재벌은 없어질 것이다. 재벌의 대안은 지주회사밖에 없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단행된 8·7개각의 뚜껑을 연 결과 재경부 장관에는 진념 기획예산처 장관이 임명됐고 이기호 경제수석은 유임됐다. DJ의 개혁카드 구상이 실종되고 ‘현실론자’들이 부상한 것이다. 집권이래 거세게 재벌 개혁을 밀어붙였던 DJ의 개혁 기조가 8·7개각을 고비로 ‘하산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DJ가 ‘김종인-정운찬’ 카드를 접었던 이유는 뭘까.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실 관계자는 “청와대 내에서는 찬반 양론이 있었다. 두 사람이 호흡이 잘 맞고 경제이론적으로도 한통이라는 것은 강점으로 꼽혔다. 반면 김 전 수석이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사법처리됐던 전력과 6공 때 경제수석을 지낸 탓에 생긴 ‘구시대 인물’이라는 이미지 등은 막판 걸림돌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재계의 조직적 반격이 낙마의 근본원인이었다는 분석이 훨씬 유력하게 돌았다.
김종인 전 수석이 경제팀 새 수장으로 검토됐던 것은 5월경부터였다. 문제는 그때부터 재계가 ‘김종인 비토작전’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8·7개각 이후 “노태우 정권 때 김종인 경제수석이 재벌개혁을 추진했으나 재계가 반발해 무산된 적이 있지 않느냐”고 언급, 재계의 반대가 진짜 걸림돌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8·7개각 인선에서 DJ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측근은 누구인가. 경제현실론자인 이기호 수석이 일단 거론된다.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번 개각은 교육, 복지, 노동을 제외하고는 경제부처가 대상이었다. 김 대통령은 인선협의를 주로 이기호 경제수석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이 수석과 신임 진념 장관은 당면과제였던 현대그룹 사태 처리과정에서 개혁보다는 경제안정에 치중하는 해법을 모색해간다.
▲ 개혁2인방 김종인(왼쪽) 정운찬을 기용하려던 DJ의 생각은 재계의 반발로 무산됐다. | ||
이기호-진념 체제에서는 대우 및 현대 그룹 해체 등에 이은 삼성 등 다른 재벌에 대한 본격적인 손보기도 시도되지 않았다. 재벌 해체라는 개혁명분보다는 경제에 미칠 파급효과 등을 고려,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간 것이다.
진 장관이나 이 수석 등이 현실적 해법을 선호했던 것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지는 ‘정답’이 없다. 단 DJ가 1년 전인 99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선언했던 재벌개혁의 서슬이 퇴색해가는 과정이었음은 분명하다.
DJ는 당시 경축사에서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차단, 순환출자를 통한 내부거래 차단, 변칙상속 증여를 통한 경영권 세습 차단 등을 선언했다. 98년 초에 밝혔던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업종 전문화, 경영진 책임강화 등 5개 재벌개혁 원칙에 3개 원칙을 추가한 것이다.
기왕의 5개 원칙이 재벌 구조조정에 관한 것이었다면 새로 천명한 3개 원칙은 재벌 경영권 세습 차단 및 해체를 겨냥한 내용이었다. 4·13총선을 앞두고 정치자금 조달을 위해 재계와 밀월을 도모할 것이라는 일반적 관측이 완전히 빗나갔던 셈이다.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DJ가 총선을 8개월 남긴 시점에서 재벌 해체를 선언한 것을 예사롭게 보면 안된다.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다. 이번 선언은 1년 6개월간 경제 위기를 극복해낸 자신감이 바탕이 됐다. 71년 대선 이후 일관된 DJ의 철학이었던 ‘대중경제론’을 실현하는 차원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그 시기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아들 재용씨의 변칙상속 문제 등에 대한 사회적 비판여론이 고조된 것도 DJ로서는 호재였다.
우선 DJ의 경축사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실의 보고서가 토대가 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정책기획수석은 DJ의 측근이었던 김한길씨였다. 김 수석은 정권 초부터 사주의 언론사 지분 소유제한 등을 통한 언론개혁 등을 주장해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보고서는 “부실 재벌 총수는 민·형사적 책임을 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아예 퇴진시키는 게 불가피하다. 기업은 살려도 재벌체제는 해체해야 한다. 대통령이 재벌총수를 만날 필요가 없다” 등등의 강경론을 담았다.
김 수석은 실제로 그 해 8월25일 정·재계간담회와 관련, “강력한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그룹 회장들을 참석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참석자 범위 조정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날 간담회에는 재벌 총수들이 참석하게 된다. 이기호 경제수석 및 경제부처 등에서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김 수석의 의견에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김태동 위원장과 동국대 황태연 교수가 8·15선언 직후 각각 ‘인적 청산론’과 ‘재벌과의 진검승부론’ 등을 주장, 파란이 일었던 것도 여권 핵심부의 기류를 반영한다. 김 위원장은 8월16일 국민회의 세미나에서, 황 교수는 8월18일 국민회의 김민석 의원의 ‘젊은 한국’ 월례 포럼에서 ‘설화’를 일으킨다.
김 위원장은 연설 원고에서 “대우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 총수들도 그룹 안에서 황제처럼 군림하고 있다. 총수나 가족은 이사회에 참석도 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대우사태는 재벌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 내에도 재벌비호 세력이 있음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정부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개혁을 할 뜻도 없고 개혁의 방법과 방향도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고 재벌개혁을 위한 인적 청산론을 폈다.
▲ ‘DJ의 개혁일꾼’ 김한길. | ||
당시 사전 배포된 원고를 본 일부 기자들이 대서특필하자 황급히 일부 내용을 삭제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청와대나 국민회의측은 이들의 주장이 ‘사견’이라고 해명했으나 설득력이 떨어졌다. 오히려 이들의 주장이 현실화 단계를 밟을 가능성을 점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나 황 교수는 모두 DJ 진영의 개혁이론가들로 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DJ가 2000년 1월 개각에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을 재경부 장관으로 기용한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었다. 이 장관은 한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에 몸담았던 전력에도 DJP 단일화 합의 실무주역이었던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의 추천으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으로 들어온다.
그때 이 장관은 재벌 구조조정의 틀을 마련해 추진함으로써 DJ로부터 개혁능력을 인정받았다. 또 금감위원장으로서 99년 7월 대우그룹의 사실상 해체와 김우중 회장의 퇴진방침을 정하는 개혁정책을 주도했다.
이 장관은 김 회장의 경기고 후배이자 79년 재무부에서 밀려난 뒤 대우그룹에 의탁해 신세를 졌음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칼을 휘두른 셈이다. 그의 개혁성향과 실천력에 대한 DJ의 각별한 신임이 발탁의 배경이라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전언이었다.
이 같은 재벌해체를 겨냥한 여권 핵심의 개혁노선이 1년여 만에 단행된 2000년 8·7개각을 계기로 ‘현실과의 타협’쪽으로 선회하자 여권 내부에서도 균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절대 명제였던 재벌개혁을 둘러싸고 ‘개혁 피로감’ 이론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2000년 9월 열린 민주당 장재식 의원의 재정경제연구회 모임에서 다수 의원들은 개혁 속도조절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평민당 출신인 김덕규 의원은 “그동안 가진 자들이 느끼는 게 개혁 피로감이었지만 이제는 없는 사람들도 느낀다”고, 언론인 출신으로 4·13총선에서 당선된 박병윤 의원은 “개혁은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집권 초반기에 해야 한다. 개혁이 집권 중반기까지 지속되면서 국민이 불안해하고 공무원이나 공기업 관계자들도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이다”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동안에는 상상도 못했던 발언들이 쏟아진 것이다. 이 같은 개혁 피로감 논란은 여권 내부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한 ‘개혁 작업 마무리’ 주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