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 바이오프(왼쪽)는 영화사와 유착관계가 탄로나자 감형을 받기 위해 보스인 프랭크 니티를 끌어들였다. |
할리우드 황금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갱스터가 있다면 단연 윌리 바이오프다. 스튜디오의 사장들은 그를 극도로 경멸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했고 결국은 의지했다. 그는 할리우드 노조를 장악하면서 한편으로는 억압했고 그 덕에 메이저 영화사들은 싼값에 노동력을 쓸 수 있었다. 윌리 바이오프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시카고에서 성장한 이민 1세대였다. 그는 틴에이저 시절부터 범죄자의 자질을 드러냈는데 큰 덩치에 완력이 셌고 머리 회전마저 좋았던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거리의 포주로 명성을 떨치면서 당시 시카고를 장악했던 알 카포네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30년대 초에 카포네가 탈세 혐의로 감옥에 가게 되자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프랭크 니티. ‘집행자’(the enforcer)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무시무시한 갱스터였다. (알 카포네를 체포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가 바로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언터쳐블>(1987)인데, 이 영화에서 하얀 양복을 입고 나오는 카포네의 심복이 바로 프랭크 니티다. 영화에선 지붕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것은 허구다) 니티 시절의 바이오프는 시카고 지역의 미국영화산업노조 지부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조지 브라운이라는 인물과 의기투합한다.
그들에게 영화산업은 마약이나 도박이나 경마 사업과 다를 바 없는 돈벌이였다. 그들은 노조의 회비를 가로채 돈 세탁에 이용했고 극장 체인에 접근해 협박했다. 5만 달러를 내면 아무 일도 없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체인 소유주가 거절하자 사고가 이어졌다. 영사실에 문제가 생겼고 극장에서 불이 났으며 갑자기 상영관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5만 달러를 상납해야 했다. 영화사에 필름을 공급하는 업체한테는 판매되는 모든 필름을 대상으로 커미션을 챙겼다. 이때 보스인 프랭크 니티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니티는 바이오프에게 수입의 50퍼센트(이후 75퍼센트로 올라감)를 바치라고 했고, 압력을 가해 조지 브라운을 미국영화산업노조 위원장 자리에 앉혔다(그는 1934~41년의 기간 동안 노조를 이끈다). 물론 브라운은 꼭두각시였고, 그 뒤엔 갱들이 있었다.
▲ 럭키 루치아노 |
바이오프의 할리우드 지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데일리 버라이어티>의 편집장이었던 아서 운저는 바이오프의 불법적 행위를 용감하게 보도하며 공론화시켰고, 당시 배우조합의 회장이었던 배우 로버트 몽고메리도 갱스터들이 더 이상 할리우드를 지배해선 안 된다며 들고 일어섰다. 이때 사건이 터졌다. 바이오프는 20세기폭스의 조셉 솅크 사장한테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받은 것이 발각되면서 브라운과 함께 감옥에 가게 되었다.
이때 바이오프는 감형을 받기 위해 자신의 동료와 보스인 프랭크 니티도 끌어들였다. 1943년, 바이오프의 증언으로 열 명에 가까운 보스나 중간보스 급의 마피아들이 소환되었고, 극심한 폐소공포증이 있던 니티는 재판을 받기 전에 집 근처에서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해 감옥에 갇히는 것을 피했다.
아무튼 그 공으로 바이오프와 브라운은 형량을 대폭 줄일 수 있었고 출감 후 브라운은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으며, 바이오프는 윌리엄 넬슨으로 이름을 바꾸고 라스베이거스 지역에 은둔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카지노 일에 간여한 것이 화근이었다. 곧 그의 존재가 갱들에게 발각되었고 1955년 11월 4일에 바이오프는 자동차 폭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다이너마이트의 강력한 화력으로 그의 사체는 거의 가루가 되었고,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했다. 한편 윌리 바이오프는 마리오 푸조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의 소설 <대부>엔 할리우드와 결탁한 노조 관계자인 ‘빌리 고프’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한편 쟈니 로셀리 같은 갱스터는 출소 후에 영화 제작자로 변신했고 여배우인 준 랭과 결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CIA와의 연루설 속에서 피델 카스트로 암살을 기획했다가 실패했으며,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배후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리고 1976년 칼에 찔린 채 플로리다의 한 부둣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