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이후 본격화…높은 업무 강도에 비해 보상·승진 기회 부족
고법판사는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리였다. 경력 15년 이상 판사 가운데 선발하는 고법판사 신청자격은 연수원 기수 3개 정도로 특정했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들은 한두 번 돌아오는 기회를 놓치면 고법판사로 근무할 수 없다. 수도권 고법판사는 인기도 많아 한때 경쟁률이 10 대 1에 달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가능한 에이스들이 뽑힌다’는 얘기가 나왔던 이유다.
하지만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없애고, 고법판사와 평판사(지법 부장판사 포함)로 이원화하면서 젊고 능력 있는 인재의 상징이 된 ‘10조 판사’들이 법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연간 1~2명 선이었던 고법판사(10조 판사) 퇴직자는 김 전 대법원장이 취임한 이후부터 10명 내외로 늘어났다. 올해도 벌써 10명 안팎의 고법판사가 사의를 표명했다.
#법원 ‘허리 나간다’ 우려
20년가량 근속 후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여부를 ‘평가’했던 법원이 고법판사를 도입한 것은 ‘2심 심리 강화’를 위함이었다. 지방법원 부장판사 수준의 경력을 갖춘 이들 가운데 고법판사를 뽑아 재판장인 고법 부장판사와 일하며 경험을 쌓게 하는 취지였다. 동시에 2심 재판부에 실력 있는 판사들을 배치해 1~3심으로 이어지는 사법 시스템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판사들 역시 고법판사의 경쟁률 등을 고려할 때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지원을 희망했다.
하지만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고법 부장판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고법판사에 대한 시장 인기는 올라가는 한편, 고법판사들이 법원에 남아야 할 이유는 사라졌다. 사법연수원 25기까지만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할 수 있었고, 그 뒤 기수부터는 폐지가 됐는데 이후 고법판사들은 대등재판부에서 2심 사건을 심리하게 됐다.
자연스레 로펌은 고법 부장판사들에 비해 젊으면서도, 2심 경험이 있어 실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은 고법판사들을 찾기 시작했다. 법원의 허리라 할 수 있는 고법판사들에게 러브콜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고법판사의 경우 3년 취업 제한 등도 없기 때문에 로펌들이 가장 탐내는 1순위 인재가 됐다.
대형로펌의 한 파트너 변호사는 “이미 대형로펌들도 다 기수마다 판사 출신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기수가 높은데 3년 동안 변호사를 했던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을 한 분 모셔오는 것보다는 젊고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고법판사 출신 2명을 뽑는 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한 셈”이라며 “고법판사들이 40~50대 초반이 주로 포진해 있고 2심까지 실무를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의뢰인 입장에서도 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늘어나는 퇴직자 규모가 이를 보여준다. 고등법원 퇴직 판사는 2018년(8명)부터 꾸준히 늘어 2021년 9명, 2022년 13명, 2023년 15명으로 늘어났다. 2월 예정된 정기인사를 앞두고 최근까지 서울고법에서만 10명 안팎의 판사가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1월 중순까지 퇴직 신청이 가능하기에, 고법판사들의 사직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 특히 서울고법 근무 연한인 5년을 채우고 지방근무를 해야 할 차례인 사법연수원 33, 34기 판사들의 사직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우려가 크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법원의 최우선 과제로 지목했지만 이를 구현할 핵심 인력이 유출되고 있는 것이다.
한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원래 법원은 엘리트들이 모인 곳인 만큼 ‘인정’을 받고 해주는 구조가 열심히 일해야 하는 동력이 되는 곳”이라며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폐지하면서 고법판사에서 고등법원 부장판사, 이후 대법관으로 이어지는 승진 코스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승진 없어 동기 잃고, 지방근무 피하고 싶어”
고법판사들의 줄사표는 업무 강도가 높은 데 비해 보상이나 승진 기회가 적기 때문이라는 평이 나온다. 과거엔 능력을 인정받은 판사가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하고, 이후엔 지법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지법원장으로 나가는 것은 ‘재판 업무를 쉴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폐지하고, 고법원장은 고법, 지법원장은 지법에서 가는 구조와 함께 판사들의 추천으로 법원장을 앉히는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열심히 해도 재판을 쉴 수 없는 시스템’이 고착화됐다. 전국에 고법이 5곳뿐이라 승진 기회가 감소한 것. 게다가 수도권 고법에서 5년 동안 근무하면 지방에 가서 근무를 해야만 하는 구조다.
한 고법판사는 “예전 선배들을 보면 고법 부장판사 승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승진하면 대법관을 노리고 또 열심히 일하다가 승진이 안 되면 법원 조직을 떠나 돈을 버는 방법을 선택했다면, 이제는 승진에 대한 동기가 없어 ‘돈’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2년 초 법원을 떠난 판사들 중에는 사법시험 수석 출신인 정수진 판사(사법연수원 32기)를 비롯해 법원행정처 기획심의관을 지낸 이호재 판사(28기)와 김영진 판사(35기) 등 과거였다면 ‘승진 코스’를 밟고 있었을 엘리트 판사들도 있다. 재판에 전문성이 있는 고법판사나, 기획 역량으로 인정을 받은 에이스 법관들이 ‘법원에 남을 이유’를 잃어버렸다는 평이 나오는 대목이다.
앞선 고법 부장판사는 “많은 판사들이 인사를 앞두고 대형로펌에 지인을 통해 취업이 가능한지 묻곤 한다”며 “재판을 열심히 해도 100만 원 안팎의 성과급이 나오는 게 전부인데 나가면 연봉 수억 원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이 그 100만 원을 받기 위해 더 일을 하겠냐”고 지적했다.
#인사 앞두고 ‘출마 희망자’도 사의 표명
한편 2월 법원 정기 인사를 앞두고 사의를 표명한 판사 중에는 총선 출마 희망자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상범 의정부지법 부장판사(34기)와 심재현 광주지법 목포지원 부장판사(30기)인데 이들 2명은 총선 출마를 위해 사직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총선에 출마하려는 공직자는 선거 90일 전에 퇴직해야 한다. 4월로 예정된 22대 총선의 경우 1월 11일이 퇴직 시한이다. 두 판사가 각각 10일과 11일 퇴직한 것은 이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대법원은 12월 중순께 대법원에 퇴직 의사를 밝힌 판사에 대해, 2월 정기 인사에 맞춰 사직을 하는데 출마 의사를 밝힐 경우 조기에 따로 수리하곤 한다.
현직 판사의 출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0년 치러진 21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이수진·최기상 의원,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이 선거에 맞춰 사직한 뒤 출마한 바 있다. 직전까지 재판을 했던 판사가 총선으로 직행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따로 입법하지 않는 한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서환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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