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오른쪽)와 김중권 전 실장. | ||
대통령과의 관계나 신임도, 파워면에서 양대 정권의 청와대 실세 3인방이 여러 모로 비슷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 먼저 문희상 실장과 김중권 전 실장의 경우 대통령과 오랜 기간, 밀접한 인연을 맺지는 않은 상태에서 발탁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김 전 실장의 경우 과거 6공 노태우 정권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DJ와 ‘업무상’ 교류가 시작됐고 97년 대선 불과 한 달여 전인 11월15일 당시 국민회의에 입당했지만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신주류의 중심인물로 파워를 행사해 왔다.
문 실장도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연청) 중앙회장을 지내는 등 정치권에서는 범동교동계로 분류되어 왔고 노 대통령과 연을 맺기 전까지는 한화갑 전 대표의 계보에 속해 노 대통령과 별반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해 6월 당시 인기가 급전직하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노 후보의 대통령선거기획단장을 맡으면서 신임을 얻기 시작해 비서실장에 중용됐다.
반면 문재인 수석과 박지원 전 수석은 노 대통령과 DJ의 ‘측근 중의 측근’이다. 문 수석은 노 대통령와 함께 82년 인권변호사 활동을 할 때부터 인연을 맺은 오랜 친구로 새 정부 들어 현안이 터질 때마다 종횡무진으로 활약해 ‘왕수석’으로 불릴 만큼 실세로 자리잡았다. 박 전 수석도 80년대 미국에서 사업을 할 당시 DJ와 만나 인연을 맺은 후 통합 민주당 대변인, 국민회의 기조실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또 DJ정부 출범 후에는 공보수석-문화관광부 장관-정책특보-비서실장 등 요직을 섭렵하며 ‘대(代)통령’으로 불리는 등 명실상부한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해왔다.
마지막으로 이광재 실장과 장성민 전 실장은 정권의 ‘소장 실세’의 대표란 점에서 비슷하다. 장 전 실장은 92년 DJ가 대선에서 패배한 후 영국에 머물 때 국내와 연락하는 통로로서 역할을 하면서 주목을 끌었으며 귀국 후에는 아태재단 이사장 공보비서로 측근으로 자리잡았다. DJ는 장 전 실장에 대해 “그 친구는 잘 쓰면 보약이고, 못쓰면 독약” “잘 닦고 연마하면 21세기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될 만한 자질을 갖고 있다”고 평가해 주목을 끈 바 있다. 그는 DJ정권 출범 당시 37세의 최연소 비서관으로 청와대 정무수석실 국정홍보담당비서관을 거쳐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하며 여권 내 파워맨으로서 위세를 떨친 바 있다.
이 실장은 좌희정-우광재로 불릴 만큼 노 대통령의 386참모그룹의 핵심으로 활동하다가 역시 정권 출범과 함께 주요 정보가 총집결된다는 국정상황실장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실장 역시 노 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해 수시로 독대가 가능한 핵심 중의 핵심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386참모그룹의 또다른 축이었던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 나라종금 사건과 관련해 활동에 브레이크가 걸린 이후 이 실장으로의 ‘힘쏠림’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신-구 정권 초기 청와대 내 ‘삼두 체제’는 역학관계의 측면에서도 유사하다. DJ정부 초기 박 전 수석과 장 전 실장이 DJ의 총애를 놓고 사사건건 충돌하는 가운데 김 전 실장이 조정역할을 맡아 균형을 이뤘다. 노무현 정권하에서도 부산인맥을 대표하는 문 수석과 386참모그룹의 정점인 이 실장이 갈등관계를 형성한 가운데 문 실장이 어느 일방이 독주하는 경향을 제어하고 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