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장 선점한 대형 엔터사 소속이 훨씬 유리…하이키·스테이씨 등 소수 중소돌 외엔 기회 못잡아
최근 국내외 K팝 팬덤 내에서 이슈가 된 아이돌 그룹을 꼽으라면 하이브(HYBE) 산하 엔터사인 빌리프랩의 신인 걸그룹 아일릿(ILLIT)을 들 수 있다. 정식 데뷔는 3월 25일로 예정돼 있지만 이들의 ‘데뷔 전 활동’이 기존 신인들과는 다른 모습이었기에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2월 27일 아일릿은 멤버 전원이 파리 패션위크에 초대돼 이날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프랑스 파리로 출국하는 모습이 보도됐다.
일반적으로 대형 엔터사 소속 아이돌이라도 신인이라면 어느 정도 활동 기간을 거쳐 국내외에서 인지도를 쌓은 뒤에야 해외 유명 이벤트에 초청되기 마련이다. 그런 만큼 아직 공식적으로 데뷔하지 않아 아직 ‘하이브 막내딸’이란 애칭으로 더 익숙하게 불리는 아일릿의 파리 패션위크 데뷔는 ‘파격’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그룹 자체에 대한 기대나 관심보단 ‘하이브의 새로운 걸그룹’이라는 점이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른바 ‘1군 아이돌’로 불리는 대형 엔터사 소속 아이돌 그룹은 단연 그 누구보다도 많은 기회를 누리게 된다. 앞서 탄탄한 국내외 팬덤을 만들어낸 선배들의 후광과 함께 업계에서 대형 엔터사가 갖는 ‘검증된 신뢰감’까지 업은 상태에서 시작하다 보니 출발 지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딛고 해외 K팝 시장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면서 처음부터 완전히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하는 중소 엔터사 소속 그룹(중소돌)과 대형 엔터사 소속 그룹 간의 격차도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전에도 중소돌은 그룹 자체의 매력과 활동만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의 K팝 시장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관심도 필수가 되다 보니 더욱 좁아진 입지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게 된 탓이다.
‘4세대 K팝’으로 분류되는 2020년부터 2024년 데뷔 그룹의 경우 이런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SM엔터, JYP엔터, YG엔터, 하이브 등 4대 대형 엔터사와 그 산하 레이블 소속 아이돌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아이돌이 데뷔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3년 사이 해체하거나 기약 없는 활동 중단에 이른 그룹도 적지 않다. 대형 엔터사는 아니지만 가수 비가 론칭해 어느 정도는 시선을 끌었던 7인조 보이그룹 싸이퍼(Ciipher)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채 데뷔 2년 만인 2023년 멤버 4명이 탈퇴하며 사실상 해체에 이르렀을 정도다.
이에 대해 코로나19 유행과 맞물려 국내 활동에도 제약이 걸린 상태에서 대형 엔터사처럼 해외 시장에 어필할 만한 기존의 ‘K팝 데이터베이스’가 전무했던 게 가장 큰 실패 요인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해외 시장에서 코어 팬덤의 유무가 인기의 척도 중 하나가 되는 보이그룹의 경우 똑같이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걸그룹보다 영향을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걸그룹의 경우 같은 코로나19 유행 시기에 데뷔해 활동을 이어갔지만 예기치 못한 흥행을 이끌어내며 국내외 음악계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례가 있다. 2023년 1월 발표한 곡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로 음원차트 역주행에 성공한 GLG 소속 하이키(H1-KEY)와 ‘큐피드(Cupid)’로 해외에서 그야말로 신드롬급 인기를 끌며 K팝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은 어트랙트 소속 피프티피프티(FIFTY FIFTY)가 그 실례다. 하이업엔터 소속 스테이씨(STAYC) 역시 중소 엔터사가 론칭한 첫 아이돌이었음에도 2021년 발표한 싱글 2집의 타이틀곡 ‘에이셉(ASAP)’ 이래 꾸준히 좋은 음원 성적을 보이며 4세대 그룹의 대표적인 ‘중소돌의 기적’으로 꼽히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코로나19 시국을 전후로 한 K팝 시장의 해외 확장과 변화가 중소 엔터사들에겐 희망이면서 동시에 절망이기도 하다고 짚었다. 그야말로 ‘먹거리’가 늘어난 대형 엔터사에게는 공격적으로 활동과 성장을 이어나갈 기회가 되지만 그들만큼의 투자가 불가능한 중소 엔터사들로서는 시장이 넓어졌어도 여전히 틈새를 파고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낸 걸그룹의 사례가 희망이 되긴 했지만 이런 기회조차도 잡지 못하는 중소 엔터사들이 훨씬 많다는 것.
익명을 원한 한 중소 엔터사 관계자는 “확실히 K팝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활동할 수 있는 무대도 넓어지고, 국내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그룹이 반대로 해외에서 인지도를 먼저 쌓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그게 곧 매출로까지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며 “오히려 해외 K팝 팬덤이 거대해질수록 이들 역시 국내와 마찬가지로 대형 엔터사 소속 아이돌에게 막대한 관심을 쏟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코로나19 시국 이전에는 유명하지 않은 중소돌도 국내 시장보다 해외 콘서트나 팬미팅으로 수익을 노릴 수 있을 만큼 관심이 분산됐던 반면 대형 엔터사에서 신인이 쏟아지는 지금은 그것도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중소돌이 대형 엔터사의 고래 싸움에서 틈새라도 노릴 수 있는 건 이전처럼 노래 자체로 대결하는 길밖엔 없는데 이마저도 틱톡이나 유튜브 쇼츠 같은 숏폼 콘텐츠를 통한 ‘바이럴 싸움’으로 번져가고 있다”며 “여기에도 대형 엔터사들이 참전하면 중소 엔터사로서는 계속해서 출발선 뒤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 K팝 시장에 다른 변화가 없는 이상 중소 엔터사는 이전보다 더 가시밭길에 놓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고 우려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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