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1월 21일 대통령 당선인 일본특사 자격으로 방일했다 돌아온 이상득 국회부의장(왼쪽)이 오자와 이치로 일 민주당 대표의 친서를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에게 전달하고 있다. 대통령직인수위 제공 |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사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8할’은 이상득의 ‘덕’(德)이었다. 2006년, 이상득은 5선으로 당내 최다선이었고,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차기 대선 후보군으로 눈부시게 떠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이상득은 동료 의원들을 만나더라도 동생을 도와달란 이야기만은 절대 하지 않았다. 이상득의 낮은 행보에 대해 당시 정치권에서는 “이 의원이 의원들과 활발히 접촉하면서도 유력한 대권 주자의 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몸을 낮추고 있다. 그런데 그게 이 시장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라는 호의적인 평가가 뒤따랐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이상득은 이명박 후보의 분신이면서 아바타였고 메신저이자 이 후보 그 자체였다. 이상득이 얼마나 긴박하게 움직였느냐 하면, 이 후보가 영남에 가면 그는 호남으로 향했고, 이 후보가 충청도를 방문하면 그는 강원도를 찾았다. 전국을 세 바퀴 돌았다. 박근혜 후보에게 가까스로 이긴 이 후보가 본선에 나선 뒤에도 이상득은 동생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이 후보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불교계에 약점을 보이자 그는 절로 향한다. 전국 웬만한 사찰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항상 사석에서 “형이 낮춰야 동생이 빛난다”라고 했다.
그때 일화다. 워낙 바쁘게 움직이던 차에 이상득은 잠이 늘 부족했다. 그래서 밤에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몇 번 그런 일이 생기자 이상득은 아예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
“대화하는 도중에 제가 깜빡 조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옆에 있는 비서가 모든 대화를 기록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꼭 챙기겠습니다.”
그러고는 또 졸았다.
경선도 그렇고 본선에서도 이 후보는 질병으로 군 면제를 받은 것이 혀끝 돌기처럼 거치적거린다. 그때 육사에 들어갔다 퇴사한 이상득의 경력이 이 후보의 약점을 덮는 역할을 한다. 노태우 정부에서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종구 한국안보포럼 회장을 데려와 대선 기간 이명박 캠프의 국방정책자문특별위원장을 맡긴 것도 이상득의 작품이었다. 이상득은 육사 퇴사 후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는데 그래도 육사 동기들과는 꾸준히 인연을 이어갔다.
2007년 12월 16일 밤 11시 30분. 이명박 후보는 “나는 특검을 수용할 수 있다”라며 BBK 특검법 수용을 전격 발표한다. 대선 투표 사흘 전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깜짝’ 기자회견이었지만 상대 후보로서는 ‘끔찍’한 사건. 뒤에 전해진 이야기지만 이 부분도 이상득의 작품이었다. “어차피 해야 할 것이라면 지금 특검법을 받는 것이 낫다”라고 설득하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권력구도에서 실세의 여부는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했느냐, 참여했다면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느냐 여부로 알 수 있다. 이상득은 그때 실세 중의 실세였다.
경선 당시 박희태 의원이 이 후보 캠프로 온 것도 이상득의 공로다. 박희태는 당시 박근혜 후보로부터도 구애를 받았다. 삼고초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박희태는 “친구 따라 캠프 간다”라고 했다. 최시중, 박희태, 이상득은 모두 서울대 57학번 동기다. 전공은 정치학과, 법학과, 경제학과로 각각 달랐지만 그들의 우정은 깊었다.
▲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7월 10일 저축은행으로부터 거액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형님내각’이다. 2008년 1월 말 즈음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한창 활동하고 있을 때였는데 이상득 의원이 당시 권철현 의원과 밀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한 언론에 포착된다. 권철현은 메모지에 몇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나갔고 이를 보던 이상득이 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킨다. 권은 이 의원이 가리킨 인사의 이력서를 건넨다. 이상득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그 이력서를 찬찬히 살펴본다. 한 달이 흘러 차관급 인사가 발표되는데 그 이력서의 주인공이 부처 차관에 오른다. 형님내각의 불씨가 된 사건이었다.
코오롱 회장 비서실장 출신인 김주성 씨가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발탁될 때에도, 이상득의 전직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과 장다사로가 청와대 비서관으로 기용될 때에도 ‘권력 사유화’ 비판이 일었다. 청와대에서 인사 추천의 실무 역할을 하는 이가 모두 이상득의 전직 보좌관들이었으니 당연한 비판이었다. 그런 일이 있으니 당시 한나라당 소장파들이 반기를 드는 것은 당연했다. 정두언 의원이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류우익 대통령실장,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장다사로 정무비서관이 권력 사유화 4인방이다’라고 공격했다. 이틀 뒤 박-장 비서관이 물러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냐는 말들이 나왔다.
2008년 4·9 총선 정국.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3~4선 중진, 70대 이상 고령, 영남권 의원들은 대폭 물갈이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이 세 기준의 교집합에 이상득이 있었다. 이상득만 물러난다면, 아니면 이상득을 내칠 수 있다면 정치쇄신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총선 승리가 담보된다는 논리가 피력됐다. 그런 와중에 대선 경선에서 함께 일했던 이상득의 ‘복심’ 정두언 의원이 ‘이상득 불출마’를 외치며 55인 선상반란을 주도한다. 하지만, 이상득은 공천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 지망생이 이상득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려 했다. 그는 이미 ‘상왕’이었다. 공천을 받을 이는 이상득이 자기를 밀고 있다고 떠들었고, 낙천할 이는 이상득 라인에 누구 없냐며 배회했다. 낙천 명분을 잃은 한나라당은 역대 최악의 공천으로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았다. 그 책임을 지고 이재오는 미국으로 떠난다.
그뿐만 아니다. 이상득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동생이) 대통령이 되면서 내게 들어온 부탁이 1000건은 된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교회를 못 간다. 이력서가 들어와서”라고 밝힌다. 이 ‘이력서 천 통’이 회자하면서 만사형통(모든 것은 형님으로 통한다)이란 별칭이 붙게 된다. 2008년 5월 17일 한나라당 광주·전남 당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상득은 “국회의원으로 당선은 됐지만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제 처지가 고통스럽습니다”라고 쌓아둔 이야기를 풀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득은 자신이 아무리 부인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반통령’이었다. 국회 한·일의원연맹 회장으로 추대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일의원연맹 회장은 여권 인사 중 실세가 줄곧 맡아왔다. 김윤환-박태준-김종필-문희상 등으로 이어진 여권 실세 라인이 18대 국회에서는 이상득으로 군말 없이 향했다. 한·일 간 미묘한 관계 속에서 실세 간의 막후 대화가 중요한 만큼 일본도 집권당의 중심인물을 회장으로 원했기 때문이다.
당직 인사도 마찬가지다. 당직에서만큼은 이상득은 ‘보이지 않는 손’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대통령의 고려대 후배이자 같은 지역구인 당시 3선의 이병석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야당 몫인 국회 지식경제위원장을 원했으나 여당 몫인 국토해양위원장에 선임된다. 영양·영덕·봉화·울진의 김광원 전 의원이 갑작스레 불출마 선언하면서 지역구를 붙잡은 강석호 당시 초선 의원은 농림위에다 예결위를 맡는다. 둘 다 ‘포항을 잘 챙기라’는 이상득의 퍼즐 맞추기의 성과란 해석이 나왔다. 김광원 전 의원은 한국마사회 회장으로 발탁되는데 이 또한 이상득의 작품이란 소리가 들렸다.
충실한 SD(이상득)맨 정종복 전 의원은 2009년 김일윤 당선자의 선거법 위반으로 4월 경주 재보궐선거에 나선다. 당시 이상득이 이명규 의원을 보내 친박계 주자로 나온 무소속 정수성 후보에게 불출마를 종용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박근혜 의원은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정치의 수치”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실제로 한나라당은 정 전 의원을 공천한다. 이상득의 힘은 그렇게 셌다. 하지만 정종복은 낙선해 이상득 얼굴에 먹칠을 한다. 2008년 박희태 당 대표-임태희 정책위의장-주호영 원내수석부대표는 이상득이 당에서 얼마나 진용을 잘 짜 놓았는지를 보여준다. 국정라인의 핵심에 모두 친 이상득 인사를 포진시켜 놓은 것이다.
이상득의 눈 밖에 나면 어떻게 됐을까도 궁금하다. 여기에 한 가지 적절한 사례가 있다. 권오을 전 국회 사무총장 이야기다. 권 전 총장은 이명박 당시 선대위에서 유세단장으로 대활약한다. 하지만 2008년 공천 리스트에서 탈락한다. 한국마사회장, 한국농촌공사 사장 물망에 오르지만 모두 물먹는다. 왜 그랬을까.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권오을은 경북도지사 후보를 경선으로 뽑자고 주장한다. 당시 이상득은 이회창 총재 시절 한나라당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당에서는 합의 추대를 원했다. 권오을은 당 주류의 흐름에 반발해 기자회견을 열고는 “당직을 맡은 아무개 의원은 총재의 뜻은 ‘경선이 아니라 현 지사를 합의 추대하자’는 데 있다며, 있지도 않은 창심(昌心)을 빙자해 경선 출마 의지를 피력한 본인에게 출마 포기를 종용했다”라고 폭로한다. 아무개 의원은 이상득을 말하는 것으로 풀이됐다. 권오을은 그때 벌써 이상득으로부터 ‘괘씸죄’에 걸린다. 3선이나 했던 권오을은 국회 사무총장을 끝으로 정치권 울타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19대 총선 공천도 받지 못했으니.
하지만, 이상득도 몰매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2009년 정부의 정책 홍보물을 특정 기업과 수의 계약한 것에 이상득이 배후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해 초 포스코 이구택 회장의 사퇴에도 이상득이 외압을 행사했단 설이 나왔다. 그해 6월 “정치현안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경제·자원외교에 전력을 다 하겠다”라고 ‘2선 후퇴’를 선언한 이상득은 전 세계를 돌며 이명박 특사로 활동한다. 그러다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이 터지고 그 배후로 지목된다. 정두언 남경필 정태근 등 일명 ‘정·남·정’도 “청와대와 국정원에 의해 사찰이 이뤄진 것을 이상득 의원이 알고 있었다”라고 폭로하고 “불법 사찰의 빅 브라더가 있다”라며 이상득을 겨눈다. 2010년 누리꾼은 ‘명박상득’(命薄相得:명이 짧아야 서로에게 이롭다)이라는 한자성어를 만들어 올해의 한자성어로 뽑는다.
이상득과 코오롱 시절부터 호흡을 맞춰왔던 보좌관 박배수 씨가 이국철 SLS 회장 등으로부터 억 단위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면서 이상득 배후설이 끊이질 않았다. 박 씨가 이명박 대통령의 사촌 처남(김윤옥 여사의 사촌 오빠)이 연루된 제일저축은행 퇴출 저지 로비에도 관여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이상득 본인은 17대 대선 직전인 2007년부터 솔로몬저축은행 회장과 미래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모두 6억 원에 가까운 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된다. 과거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코오롱그룹으로부터 정상적인 회계처리를 하지 않은 채 자문료 형식으로 1억 5000만 원을 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 권력으로 흥해 돈으로 망한 2인자의 퇴장방정식에서 그는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최기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