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바 ‘벤처비리’로 악명을 떨친 정현준씨(왼쪽)와 진승현씨. 두 사람은 거액의 불법대출을 받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정치권에 광 범위하게 로비를 펼쳤다. | ||
‘돈 정치’ 단절을 외치던 정권도 별수 없다는 한심한 느낌이랄까. 그러나 DJ정권 기간 중에도 선거 비자금과 관련돼 막전막후에서 떠돌던 향기롭지 못한 풍설은 적지 않았다. 단 그 각도는 달랐다. 박 전 실장이 아니라 동교동계 실세들이 비공식적 선거자금 조성과 배분의 타깃으로 시달렸다.
여의도 정가 막후에서 떠돌던 여권의 스캔들은 ‘벤처 투기설’이었다. 일명 ‘검은 머리 외국인’의 벤처 투자로 불리기도 했다. 민주당과 청와대의 실세들이 주로 외국인 투자회사를 활용해 대대적으로 벤처기업에 투자했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 시기다.
99년 말부터 2000년 초반까지 코스닥 시장은 폭등해 투기바람이 불었다. 잘나가는 벤처기업들이 쏟아져 나오고 30대 초반 사장들이 강남의 고급 룸살롱을 주름잡았다. 이전까지는 대기업 고위층, 고급각료, 정권 실세 등이 룸살롱에서 대접을 받았으나 벤처 사장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농담이 정치권에서 유행어처럼 번졌다. 쉽게 돈을 벌어서 1백만원짜리 수표 서너 장은 겁없이 쓰는 젊은 사장들이 강남 유흥가의 VIP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 신진기예들은 1년을 넘기지 못해 ‘칼바람’을 맞고 쓰러졌다. 코스닥 시장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물론 ‘벤처 거품론’이 정설이다. 내실 없는 벤처들이 열풍을 타고 떴다가 손쉽게 스러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치권의 투기가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2000년 4·13총선과 민주당의 8·30최고위원 경선을 앞두고 여권 실세들이 집중적으로 코스닥 시장에 투자, 과대성장을 시켜놓고 두세 배로 뻥튀기된 현찰을 챙겨 썰물처럼 빠져나갔다는 게 그 요지다. 2001년 1월 민주당 김중권 대표가 테헤란밸리의 벤처 사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벤처 사장으로부터 “다시는 정치자금이 코스닥에 들어오지 않게 해달라”는 낯뜨거운 지적을 받았을 정도였다.
특히 권노갑 민주당 전 고문은 약방의 감초처럼 풍설에 등장했다. 당시 민주당 출입기자들 중 상당수는 친지나 얼굴을 아는 벤처 투자자들로부터 “A벤처에 권 고문이 들어간다는데 맞느냐”는 식의 질문을 받곤 했다고 한다. 10억원대 안팎을 굴리는 벤처 투기꾼들 사이에는 “권노갑이 들어가는 벤처에 베팅하면 10배까지 남길 수 있다”는 얘기가 무성했다.
‘권노갑의 향배야말로 최고급 투자정보’라는 소리까지 들렸다. 물론 이런 풍설은 풍설로 그쳤다. 검찰수사 등을 통해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따라서 풍설과는 달리 소위 작전세력들이 주가조작을 시도하면서 여권 실세인 권 전 고문의 이름을 팔아서 다른 투자자들을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 전 고문이 구설수에 시달린 것은 그가 정치자금의 배분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자칭 타칭으로 ‘정거장’으로 불릴 정도였다. 들어온 돈을 개인적으로 쓰지 않고 선거자금 등으로 나눠줬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4·13총선의 경우만 해도 당시 민주당 후보들에게 김옥두 사무총장이 3천만∼5천만원을 ‘실탄’으로 지급했고 권 전 고문이 1천만원 이상씩을 추가 지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민주당측은 즉각 부인했지만 상당수 후보들이 권 전 고문측에 “왜 나는 안주냐”고 따지며 지원을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권 전 고문이 선거자금을 배분하는 역할을 했다는 데 다수 민주당 의원들은 동의한다.
권 전 고문은 특히 386세대 등 신진인사들에게 선거자금을 후하게 지원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젊은 피 수혈’이라는 기치를 들고 4·13총선 선거전을 폈던 민주당은 공천과정에서 운동권 경력을 갖춘 386세대를 우대했다. 똑같은 연배라도 전문직 출신보다는 운동권 경력을 선호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성을 가진 DJ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한나라당의 수구 이미지를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공천 낙점과정을 주도했던 권 전 고문은 386세대를 양성했던 장본인으로서 지원금도 각별하게 챙겨줬다고 볼 수 있다.
권 전 고문 본인도 8·30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전에서 김근태 정동영 의원에게 2천만원씩 지원했다고 시인한 적이 있다. 때문에 훗날 민주당 내 소장 개혁파들이 권 전 고문,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타깃으로 한 정풍운동을 벌였을 때 권 전 고문측에서는 “제일 도움을 많이 받은 자들이 공격한다”고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YS정권의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처럼 그가 자금 조성까지 담당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폭로전만 난무했을 뿐이다.
2000년 11월2일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정현준 한국디지탈라인 사장의 불법로비 의혹을 폭로하면서 여권 실세 ‘K-K-K-P’가 관련됐다면서 실명을 거론했다. 권 전 고문, 김옥두, 김홍일 의원, 박준영 청와대 공보수석이라고 공개해버린 것이다.
한나라당 관계자 및 보좌진들은 당시 의혹을 증폭시키는 내용도 흘리고 다녔다. 여권 핵심세력이 IMF위기 당시 외화도입 과정에서 커미션으로 챙겨 홍콩에 숨겨뒀던 자금을 국내로 들여와 코스닥 주가조작으로 ‘뻥튀기’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정 사장의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에 대한 경찰 조사도 여권 실세들이 압력을 넣어 중단시켰다는 주장도 폈다. 평소 말수가 적었던 이 의원은 자신의 ‘독자적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폭로 뒤에는 정형근 의원이 숨어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관계자들도 “그 정도 사안은 이회창 총재가 결정했다고 봐야 한다”고 추측했다.
2001년 하반기에 터져 나온 ‘진승현 게이트’도 민주당의 선거자금 관련 스캔들의 일종이다. 권 전 고문과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 간의 파워게임의 성격을 지녔던 진승현 게이트는 권 전 고문뿐만 아니라 일부 민주당 의원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여권 실세 ‘K-K-H’로 압축되는 ‘진승현 리스트’에 포함된 정치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 민주당의 정치자금 ‘정거장’으로 불린 권노갑 전 고문. 진 승현 게이트 연루혐의에 대해 무죄판결 을 받았다. | ||
권 전 고문도 진씨에게 로비자금으로 5천만원을 받았다는 김 전 차장의 진술로 인해 2002년 중순경에 구속되지만 최근 무죄판결을 받았다. 권 전 고문과 정치적으로 갈등을 겪었던 김 전 차장의 진술이 신뢰도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정황설명이 타당성이 없다는 게 판결의 배경이었다.
장기간에 걸친 검찰수사에도 불구하고 이들 게이트가 DJ정권 선거자금 조성 수단이었다는 증거가 드러난 바는 없다. 한나라당의 강력한 주장과 언론의 상업주의적 보도만 무성했을 뿐이다. 하지만 진씨나 김씨가 정치권에 집중적으로 로비를 폈던 시기가 총선 및 최고위원 경선시기를 전후로 한 시점이라는 점은 중요한 대목이다. 실탄에 목말라하던 여권 실세나 정치인들이 ‘위험한 돈’을 급하게 받아 쥐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게이트는 공교롭게도 진실의 키를 쥔 인물들이 사망했다는 공통점을 갖기도 했다. 속시원하게 진위가 밝혀지지 못한 데는 이 점도 작용했다. 정현준 게이트 때는 검찰 수사 도중에 금감원 J국장이 자살했다. 진승현 게이트의 경우 김 전 차장의 전임자였던 엄익준 전 차장이 사망한 상태였다. 상당수 의혹의 고리들은 이들 망자들과 무관치 않았다.
DJ정권 기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던 기업매각이야말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조성할 수 있는 황금거위였다는 주장도 나왔었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기업매각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DJ정권은 외자유치를 명분으로 국내기업을 해외자본에게 헐값으로 매각했다. 정권 실세들이 외국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서 알짜기업을 얼마든지 싸게 사서 거액을 챙길 수 있는 구조다”라고 목소리를 높인 적도 있다.
DJ정권이 불법 선거자금을 조성한 증거가 분명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민주당이 쓴 총선자금 등의 규모 때문이다. 4·13총선이 끝난 후 민주당측에서 밝힌 선거자금 총액은 국고보조금, 후원금, 선거 보전금 등을 합쳐서 1천억원 안팎에 그쳤다. 그러나 실제 풀린 선거비용은 수천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게 일반론이었다.
민주당 의원들조차도 “여야간 경쟁이 치열한 수도권에서 20억원 이하로 쓰고 당선됐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4·13총선 당시 수도권 선거구는 1백여 개에 달했다. 20억원씩만 따져도 2천억원이 수도권 선거전에만 투여됐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볼 때 최소 2천억~3천억원은 비공식 경로를 통해서 선거자금이 투입된 셈이다.
8·30최고위원 경선도 마찬가지다. 여권 내 차기 대권 및 당권 주자를 결정짓는 성격이 강했던 경선은 후보들 간 재력의 경연장이기도 했다. 한 후보는 외출할 때 ‘007 가방’을 들고 나갔다는 소문을 경쟁적으로 퍼뜨렸다. 김근태 의원은 경선 한 달여 전인 7월 중순에 “최악의 돈 선거가 우려된다”면서 “후보 1인당 최소 20억원이 들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김 의원은 경선전에서 ‘더부살이 유세’를 한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다. 한 유력 후보는 “솔직히 지방 다니면서 대의원 만나는 게 다 돈이다. 대부분 식당에서 모임을 갖는데 그 밥값이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식당에 돈을 내고 사람을 모아놓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김근태 의원이 돌아다니면서 악수를 하고 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엉뚱한 사람이 장사를 하는 것이다”라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고위원 경선전에 투입된 막대한 선거자금의 출처도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등과 같은 야당도 선거자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야당은 사정상 주로 재력 있는 후보들로부터 특별당비를 헌납하는 방식으로 비공식 자금을 조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궁진 청와대 정무수석은 2000년 3월 말께 총선 특별당비에 대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2월 관훈토론회에서 돈을 안 받겠다고 얘기했다가 최근 당비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선회했다. 이는 ‘돈 공천’을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세풍사건만 봐도 알겠지만 상당한 거액이 오가지 않겠느냐”고 비난조로 언급하기도 했다.
실제로 총선을 전후로 강원지역에서 한나라당 공천신청자가 3억원 특별당비를 요구받고 공천신청을 포기했다는 소문 등이 흘러나왔다. 한나라당 중진들이 총선 후 남은 특별당비 처리문제를 이 총재에게 상의하자, 깐깐한 성격의 이 총재가 “나에게 그런 말은 꺼내지 말라.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 게 중간 당직자들의 전언이다.
군소 야당 중에서는 민국당이 가장 많이 구설수에 올랐다. 당초 전국구 1번으로 최형우 전 의원의 부인이 1순위로 올랐으나 20억원의 특별당비를 낼 수가 없어서 밀려났다는 후문이다. 대신에 재력가인 강숙자씨가 1순위를 차지해 민국당이 참패한 4·13총선에서 유일하게 금배지를 달았다. 강씨는 공천헌금으로 30억~40억원을 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밖에도 김상현 전 의원이 4억원, 윤원중 전 의원이 2억5천만원을 냈고 재야 출신인 장기표씨까지도 1억원을 냈다고 한다. 총선 당시 1억4천만원을 재산신고했던 장씨는 지지자들에게 잔돈을 후원금으로 받아 1억원을 마련했다고 한다.
민국당 관계자는 “우리가 받은 돈은 모두 후보 등록비에 썼기 때문에 돈 공천이 아니다. 1인당 후보 등록비가 2천만원인데 민국당은 지역구 1백26명과 전국구 19명 등 1백45명을 등록했다. 등록비만 29억여원이 들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