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푸신, 헵번, 지방시. |
오드리 헵번과 험프리 보가트와 윌리엄 홀든이 출연했던 <사브리나>(1954)의 감독 빌리 와일더는 헵번과 카푸신(Capucine)의 관계를 놓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우정”이라고 이야기했다. 헵번 자신도 “나는 절반의 여성이다. 나머지 절반을 알고 싶다면, 당신은 카푸신이라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녀는 나에게 산소 같은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랑스 출신으로 헵번과 무명 모델 시절을 함께했던 카푸신. 지방시가 가장 아꼈던 모델이기도 했던 그녀는 <핑크 팬더>(1963)와 <고양이(What’s New, Pussycat)>(1965) 등 배우로도 성공을 거두게 되며, 유럽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활동하는 당대를 대표하는 미인이었다. 할리우드에선 ‘제2의 가르보’로 부르기도 했다.
1928년 1월 6일 오드리 헵번보다 1년 먼저 태어난 카푸신(본명은 ‘제르만느 르페브르’)은 10대 때 이미 170센티미터의 키에 늘씬한 몸매를 지녔고 모델로 성공하기 위해 돈을 훔쳐 가출한다. 파리로 온 그녀가 만난 사람은 바로 오드리 헵번. 그들은 자그마한 아파트의 하우스메이트로 우정을 쌓아갔다. 당시 그들은 극도의 우울증을 겪고 있었는데(카푸신은 평생 조울증으로 고생했다), 서로 위로하며 성공을 다짐했다. 헵번과 카푸신의 ‘친구 이상의 관계’, 즉 동성 연인 관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 관계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1940년대 말 카푸신이 먼저 명성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깎아지른 듯한 얼굴을 이집트 여왕인 ‘네페르티 이트’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카푸신이 트랜스젠더라는 것. 하지만 근거 없는 루머는 아니었다. 1949년 카푸신은 <줄리엣의 랑데부>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는데, 이때 만난 피에르 트라보드와 사랑에 빠진다.
카푸신과 트라보드는 1950년에 결혼해 6개월 만에 이혼하는데, 이후 트라보드가 친구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트라보드는 카푸신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했으며, 태어날 때 미발달된 페니스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 이 말이 신빙성을 지니는 건 트라보드의 성적 취향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여성 옷을 즐겨 입는 남성 복장 도착자나 성전환자들과 섹스를 즐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침대에서 더 큰 쾌락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고, 카푸신과도 그런 이유로 결혼했지만 트러블이 생기면서 헤어졌던 것. 어쩌면 그 트러블의 원인은 카푸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었을 듯한데, 이후 할리우드에 진출한 후 카푸신은 “할리우드의 모든 레즈비언들이 나에게 만나자고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카푸신에 의하면 <오즈의 마법사>(1939)의 도로시로 유명한 주디 갤런드도 레즈비언이었다고 한다.
카푸신이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프랑스 영화계에서 단역을 전전하던 시기, 헵번은 미국으로 건너가 <로마의 휴일>(1953)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다. 그리고 1954년 <사브리나>에서 험프리 보가트, 윌리엄 홀든과 공연하던 중 헵번은 홀든과 사랑에 빠진다. 당시 홀든은 여배우인 브렌다 마셜과 결혼한 상태였는데 헵번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아내와 별거에 들어가게 된다. 헵번은 홀든의 아이를 가지길 강렬하게 원했다. 하지만 첫 아이를 낳은 후 정관수술을 해버린 홀든은 헵번의 꿈을 이뤄줄 수 없었고, 결국 헤어진다. 이후 헵번은 배우인 멜 페러와 사랑에 빠졌고 1954년에 결혼하지만, 홀든은 좌절감에 알코올에 빠져들었고 수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지는 문란한 생활을 한다.
헵번이 할리우드에서 승승장구하며 결혼하던 시기인 1956년에 카푸신은 파리에서 LA로 온다. 처음엔 모델 일이 목적이었으나, 우연히 찰스 K. 펠드먼의 눈에 띄었다. 펠드먼은 존 웨인을 스타로 만들었던 당대 최고의 스타 조련사. 카푸신의 외모에 매료된 펠드먼은 당장 계약서를 내밀었고 카푸신은 비로소 제대로 된 배우 훈련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력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사실 카푸신의 배우 생활은 연기력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외모 덕분이었다.
카푸신과 헵번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이 시기였다. <끝없는 노래(Song Without End)>(1960)에 출연한 카푸신은 공연했던 더크 보가드(그는 게이였다)와 친해졌고, 어느 날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았다. 오래 전부터 헵번과 동성 연인이었다고 말한 것. 보가드는 자신의 몇몇 게이 친구들에게 이야기했고, 할리우드의 웬만한 사람들은 소문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카푸신은 누군가와 친해지면 자신과 헵번과의 관계를 털어놓곤 했는데, 그 대상은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1962년에 <워크 온 더 와일드 사이드(Walk on the Wild Side)>에서 만나 친구가 된 앤 벡스터는 이후 거의 메가폰 같은 존재가 되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