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27일 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정대철 민주당 대표의 모습.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었고 정대철 대표는 국립묘지의 선친 묘소를 방문했다. 이종현 기자·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은 그간 대선자금·음모론 등으로 청와대를 압박해 온 정 대표의 ‘위험한’ 발언과 이로 인해 날로 가열되는 여권 분열 양상 등과 관련, 장고를 거듭해 왔다. 그 결과 ‘정면돌파’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최근 노 대통령은 ‘굿모닝 게이트’와 관련해 정 대표가 ‘음모론’을 주장하며 청와대 인사 문책론까지 제기한 데 대해 “음모론은 사실무근이며 아직 청와대 조직개편 계획도 없다”고 말해 정 대표와의 ‘관계’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노 대통령은 또한 ‘통합신당’쪽으로 방향을 잡은 정 대표에 거리를 두며 정치개혁을 화두로 여론 형성에 나서, 노심(盧心)의 행로를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정 대표에 대한 노 대통령의 최근 태도엔 민주당에 대한 입장, 신당을 포함한 정계개편, 향후 국정운영 방향 등에 대한 많은 함의가 내포돼 있다는 관측이다.
굿모닝 게이트의 파열음은 의외로 컸다. 단순 사기분양사건으로 막을 내릴 수도 있었던 ‘단막극’이 파노라마식 대형 공연으로 탈바꿈한 것.
집권여당 대표가 ‘게이트’ 무대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관객은 놀랐고, 예상을 벗어난 각본에 정치권은 허둥댔다. 동시에 ‘분장’ 속에 감춰진 정치적 욕망들이 조명 아래 알몸을 드러내면서 동지와 적이 혼재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검찰의 칼이 번득이자 당 대표는 물론 민주당 신주류 중진조차 ‘통합신당’이란 보호막을 치며 몸을 사렸다. 나아가 통합신당이 최선임을 소리 높여 외치며 청와대에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
집권여당의 간판인 정대철 대표는 위기에 몰리자 노 대통령에 대한 압박에 나섰다. ‘음모론’과 ‘청와대 문책론’이 그것. 정 대표는 노 대통령이 자신의 카드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제2·제3의 카드를 내밀 수 있음을 강력히 경고했다.
노 대통령의 당내 지지를 이끌어왔던 신주류 중진조차 한 일간지의 오보성 보도에 흥분, ‘음모론’에 동의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과 측근 그룹은 정 대표를 비롯한 당 중진들의 이러한 태도에 크게 실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의 한 386 핵심 관계자는 “일부 참모들이 ‘정대철 파동이 장기화될수록 개혁신당의 동력이 떨어지고 정치개혁의 로드맵도 실종될 우려가 있다’며 그들과 ‘분명한 선’을 그을 것을 주문하자 노 대통령은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지난 7월21일 대선자금 공개 특별기자회견에서 정 대표의 대선자금 발언에 대해 ‘여권 고위관계자의 실언(失言)’으로 규정하고 검찰의 수사에 청와대가 간섭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 정 대표와 동조세력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노 대통령과 가까운 한 재선 의원은 “지난 7월28일 정 대표가 신당논의와 관련해 ‘민주당 법통, 정통성 계승 노력을 폄하말라’는 주장을 한 데 대해 노 대통령측 인사들은 정 대표가 노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는 한화갑 김근태 추미애 의원 등과 합류할 것으로 보고 ‘더 이상 동행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결론 짓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정 대표 문제는 법 그대로 맡겨두겠다는 입장으로 노 대통령과 정 대표 사이의 거리는 사실상 멀어지고 있는 셈. 결국 ‘결별’의 카운트다운만 남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 대선전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29일 노무현 당시 후보와 정대철 선대위원장이 ‘희망 돼지’ 전달식을 갖고 있다. | ||
이는 노 대통령이 그간 “당 문제는 당이 알아서 하라”며 신당문제에 공식언급을 자제해온 데 이어 최근엔 ‘코드’를 맞춰왔던 신주류 인사들의 면담 요청에 응하지 않는 등 접촉을 꺼리고 있어 ‘탈당설’이 힘을 얻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지난 7월21일 여야 대선자금 공개를 촉구하는 특별 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이 “나는 여당의 영수가 아니라 행정부 수장이다. 여야 영수회담은 민주당과 한나라당 대표가 만나 회담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회담을 제안해 온다면 행정부 대표로 국회 대표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것을 두고 정가에서는 ‘민주당 탈당을 염두에 둔 발언’이란 해석이 제기되기도 했다.
정대철 대표가 7월24일 밤 “민주당과 청와대는 ‘순망치한’의 관계”라고 말한 것을 놓고도 노 대통령의 ‘당과의 거리 두기’, 더 나아가 탈당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견제용 메시지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야당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탈당 형식을 빌어 민주당과 결별함으로써 신당창당파의 탈당을 자유롭게 해주는 동시에, 굿모닝 게이트를 비롯해 세간에 떠돌고 있는 여러 대형 비리문제를 연쇄적으로 터트림으로써 여야 불문하고 기존 정치권을 흔들어 놓은 뒤 이를 디딤돌로 삼아 신당을 추진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정가에서는 노 대통령이 민주당과 거리를 두려는 것을 모종의 ‘그랜드 디자인’을 구상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정치개혁을 통해 신당 문제가 매듭되는 연말쯤 당적 이탈로 이어질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한편 최근 청와대의 한 핵심 측근은 노 대통령이 신당 논의가 당분간 지지부진할 것으로 보고 정치행로를 전환, ‘대국민정치’에 전력할 것임을 귀띔했다. 따라서 현안으로 떠오른 대선자금, 정대철 문제 등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풀어가고 민주당 신당논의에도 거리를 둘 것이라는 것. 즉 ‘당정분리’ 원칙을 고수, 중립적 위치에서 국민들에게 정치개혁 화두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나갈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노 대통령이 지난 7월18일 청와대 정무팀과의 미션보고에서 “대(對) 정당이 아닌 대 국회를 상대로 정치를 할 것”이라며 “여당과 야당의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데서도 예상된다.
노심(盧心)에 정통하다는 한 측근 인사는 신당 및 정계개편과 관련, “노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당의 모습에서 한계와 실망을 함께 느낀 것 같다. 현재의 민주당이나 통합신당으로는 ‘개혁’은 커녕,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통합신당과 개혁신당이 각개 약진하고 대국민정치를 통해 여론의 지지가 상승하면 ‘범국민통합신당’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1월쯤 합당을 통해 신당을 만들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연합공천 방식으로 각자 우세 지역에서 총선을 치른 뒤 정책연합이나 통합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다른 측근 인사는 “일단 민주당 신주류와 한나라당 탈당파, 각 지역의 정개추, 범개추 등 범개혁세력이 통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며 “이것이 제대로 안될 경우 위와 같은 방식이 현실성을 띨 수 있다”고 전망했다.
어쨌든 굿모닝 게이트는 민주당 통합신당파에게 힘을 실어준 반면, 노 대통령에게는 ‘마이웨이’를 가속화하는 방편을 제공해주었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진무(塵霧)속에 ‘결별’의 굉음이 점차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