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11월, 평범한 가정의 하루가 순식간에 비극으로 바뀌었다. 나고야시의 한 아파트에서 주부 다카바 나미코(당시 32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이웃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나미코는 흉기에 찔려 이미 숨진 상태였다. 시신 곁에는 두 살배기 아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무사했다. 남편 사토루는 출근일이라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수사는 장기간 표류했다. 도난 흔적이 없어 경찰은 ‘살해 자체가 목적’일 가능성에 주목했으나 뚜렷한 원한 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장에는 중요한 단서가 남아 있었다. 아파트 현관과 약 500m 떨어진 공원에서 피해자와는 다른 인물의 B형 혈흔이 발견된 것이다. 범인 또한 흉기에 손을 다친 것으로 추정됐으며, 공원 음수대에는 누군가 피를 씻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찰은 루미놀 시약을 이용해 혈흔을 찾아내는 감식 기법으로 도주 방향을 추적하려 했다. 그러나 사건 다음 날 내린 폭우가 모든 흔적을 씻어버렸다.

26년 동안 경찰은 나미코 사건을 수사하면서 총 10만여 명의 수사관을 투입했고, 5000명 이상의 관련자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올해 8월, 살인 용의자로 야스후쿠 구미코(여·69)가 수사 선상에 올랐다. 피해자 나미코와는 일면식이 없지만, 남편 사토루와는 고교 동창 관계였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경찰이 여러 차례 DNA 채취를 요청했으나, 야스후쿠가 거부로 일관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사망이 좁혀지며 압박이 커지자, 결국 10월 31일 스스로 경찰에 출두해 DNA를 제출했다. 또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자신이 저지른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처음엔 범행을 인정하며 “학창 시절 사토루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26년 동안 매일 불안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야스후쿠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 범행동기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야스후쿠의 체포 소식을 들은 사토루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라며 “(용의자가) 제 지인이기 때문에 나미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덧붙였다.
고교 시절, 야스후쿠는 사토루와 같은 동아리 ‘소프트 테니스부’에서 활동했다. 밸런타인데이에 사토루에게 초콜릿을 건네는 등 호의를 보였고, 대학 진학 후에도 사토루를 찾아와 교제를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여성이 있었던 사토루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 일은 사토루의 기억 속에서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야스후쿠가 체포된 뒤에야 여동생의 말을 듣고 그때의 일을 떠올렸을 정도다.
그가 기억하지 못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1970년대에 교제를 거절한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는 데다, 20여 년이 지난 1999년 동아리 동창회에서 만난 것이 전부였다. 사토루는 “당시 야스후쿠가 ‘나도 결혼해서 일도 가정생활도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며 “오랜만에 본 동창 중 한 명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가족을 살해하러 올 것이라 상상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본 DNA 수사 향후 과제
이번 사건에 종지부를 찍은 결정적 단서는 DNA 감정이었다. 현장에 남겨진 범인의 혈흔과 야스후쿠 용의자의 DNA가 일치하면서, 경찰은 마침내 그를 체포할 수 있었다. 다른 미제사건 수사에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지만, 동시에 ‘DNA 수사가 어디까지 허용돼야 하는가’라는 과제를 일본 사회에 던졌다.
진실의 문이 열리는 데 26년이나 걸린 이유는 일본 특유의 신중한 수사 절차와 인권 보호 원칙 때문이었다. DNA는 개인의 ‘유전적 정체성’을 담고 있어 일본 사회에서는 이를 ‘궁극의 개인정보’로 인식한다. 따라서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대해서도 “효율적인 수사 도구”라기보다 “국가 권력이 개인의 신체 정보를 침해할 위험”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일본의 미제사건 유족들 사이에서는 DNA 수사 법제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토루 역시 오랫동안 “법적으로 정비해 유전자 정보를 수사에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호소해 왔다. NNN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서는 DNA 수사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도카이대학의 이마니시 다다시 교수는 “현장에 남겨진 혈흔 등으로 범인의 얼굴 예상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성별과 혈액형은 물론, 연령도 3세 오차 범위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그는 “DNA를 통해 예측한 얼굴의 정확도는 실제 인물과 비교했을 때 아직 10% 수준”이라며 “앞으로 정밀도를 높여 나가고 싶다”고 밝혔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