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최근 건설중장비업체 ‘밥캣’ 띄우기에 나섰다. 지난 2007년 박 회장이 주도해 인수한 밥캣은 수년간 두산그룹의 재무 상태를 악화시킨 주요 원인이었다. 금융권도 ‘인수가격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두산의 밥캣 인수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부진을 면치 못하던 밥캣 실적이 턴어라운드 조짐을 보이자 박용만 회장이 기다렸다는 듯 적극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박용만 회장이 밥캣을 띄우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 속사정을 들여다 봤다.
박용만 회장은 지난해 그룹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밥캣 실적에 대한 기대감을 적극 표명했다. 그룹 회장에 오르기 전에도 박 회장은 밥캣을 가리켜 ‘두산의 복덩어리’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밥캣 인수에 대한 우려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터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2007년 밥캣 인수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박용만 회장이었다. 박 회장은 두산그룹의 M&A를 이끌며 두산을 식음료 전문 기업에서 기계·중공업 전문 기업으로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
또한 대부분 인수 자금을 풋옵션(장래 특정 기간에 주식, 채권, 금리, 통화 등의 상품을 특정 가격으로 매각할 수 권리) 조항을 단 외부 자금으로 충당했기에 그동안 들인 금융비용이 만만치 않다. 글로벌 건설경기가 눈에 띄게 좋아질 것 같지 않다는 전망도 두산에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미국 주택경기가 살아나는 것이 건설경기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주택경기와 건설경기는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주택경기가 물론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플랜트, 토목 등이 같이 살아나야 진정한 건설경기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며 “아직까지는 침체 분위기”라고 말했다.
두산인프라코어가 인수한 밥캣 지분에 대한 평가가치도 인수할 당시보다 반토막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 당시 재무적투자자들에게 발행했던 8억 달러(약 9000억 원) 상당의 전환상환우선주의 가치가 현재 5000억 원가량에 불과한 것. 밥캣을 인수하고 나서 2007년 11월 박 회장은 “밥캣을 인수하기를 잘했다”며 “인수 당시보다 가치가 늘었다”고 자평한 바 있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M&A업계 관계자는 “시너지 효과도 좋지만 인수 가격이 너무 높으면 두고두고 부담이 된다”고 지적했다. 두산인프라코어 관계자는 “인수 당시 차입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를 모두 만회하려면 앞으로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두산인프라코어가 밥캣 지분을 담보로 신규 자금을 조달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밥캣이 시장에서 얼마나 냉대를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최근 밥캣 지분을 담보로 기업어음과 채권 상품을 만들어 4000억 원의 신규 자금을 조달하려 했으나 2100억 원을 마련하는 데 그쳤다. 웅진그룹 사태를 겪은 시장이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탓으로 풀이된다.
모자란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두산인프라코어는 밥캣 지분을 담보로 금융권 대출을 추진 중이다. 두산인프라코어 관계자는 “진행 중인 것은 맞지만 아직 결정된 바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박용만 회장은 그룹 내에서 밥캣의 위치와 실적을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재계 한 관계자는 “결자해지 차원 아니겠느냐”며 “그룹 회장이자 밥캣 인수를 주도한 사람으로서 밥캣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장조카 밀어주기 ‘앞장’
두산그룹은 3세들의 형제경영으로 유명하다. 맏형인 박용곤 명예회장 이후 형제들이 차례로 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서울대 의대 박사 출신에다 서울대병원장까지 지낸 박용현 전 회장마저 형제경영에 동참했을 정도다. 박용만 회장은 두산 3세 형제경영의 사실상 마지막 주자다. 동생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이 있지만 이미 ‘딴살림’을 차리고 나간 터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박용만 회장에 대해 ‘두산의 4세경영으로 가기 위한 중간다리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맏형 박용곤 명예회장부터 고 박용오-박용성-박용현 전 회장까지 두세 살 터울이 나는 것에 비해 박용만 회장은 바로 위 형인 박용현 전 회장과 띠동갑이다. 또 박 회장의 두 아들 박서원 빅앤트인터내셔널 대표(35)와 박재원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30)는 두산그룹에서 일하지도 않는다.
두산그룹의 대권은 결국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두산가 장손인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에게 갈 것으로 보는 이가 적지 않다. 그 증거가 지난해 5월 박정원 회장이 두산그룹 지주부문 회장으로 선임된 것. 박정원 회장은 명실상부하게 그룹 회장인 박용만 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다. 두산건설이 현재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음에도 박정원 회장을 지주부문 회장으로 선임한 것은 차기대권은 박정원 회장에게 있음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이 적지 않다. 박용만 회장이 적극 권했고 박정원 회장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금융권에서는 건설경기 위축과 미분양 등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두산건설에 주목한다. 장손 박정원 회장이 이끌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만약 두산건설에 문제가 생기면 박정원 회장이 그룹 회장에 오를 명분이 없어진다. 따라서 두산건설 최대주주인 두산중공업을 비롯해 그룹 차원에서 두산건설을 살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두산중공업은 지급보증, 유상증자 형태로 두산건설을 지원하고 있고 박용현 전 회장은 직접 두산건설 주식을 매입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두산건설을 살리는 것이 박용만 회장의 미션 중 하나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그룹 재무 상태를 안정적으로 만든 뒤 박정원 회장에게 대권을 넘긴다는 것이 시나리오 중 하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