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홍 회장이 지난해 1월 임시총회에서 기자들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 연합뉴스 |
“다른 거 다 떠나 후배잖아요. 본인이 열심히 살아보겠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묵묵히 지켜봐야죠. 그게 선배인 제가 할 일 아니겠습니까.”
지난해 12월. 2011년 이후 야인으로 살던 선수협 전 회장 손민한이 언론을 통해 현역 복귀 의사를 나타내자 현 회장 박재홍은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는 속내를 밝혔다. 그즈음 박재홍은 SK와의 재계약이 불발되며 다른 팀 입단을 알아보고 있었다. 다행히 몇몇 팀에서 박재홍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박재홍은 어느 팀 유니폼도 입지 못했다. 결국 선수등록 마감일인 1월 31일을 일주일 앞두고 은퇴를 선언했다. 박재홍이 새 팀을 구하지 못한 건 전적으로 그의 직함 때문이었다. 바로 선수협 회장이다.
모 팀 관계자는 박재홍을 “반드시 주전이 아니라도 대타, 백업요원으로 활용폭이 넓은 선수”라고 평가하고서 “그러나 박재홍을 단순히 선수로만 보기엔 ‘선수협 회장’이란 직함이 주는 부담과 무게감이 상당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만약 박재홍이 선수협 회장에서 물러난 뒤 새 팀을 알아봤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냐”는 질문에 이 관계자는 “다른 팀은 몰라도 우리 팀은 즉시 영입했을 것”이라며 “어째서 박재홍이 은퇴하는 시점까지 회장 타이틀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 “박 역대 최고의 회장” 찬사
1월 25일 은퇴를 선언한 박재홍은 “선수협 회장에서 물러났으면 새 팀을 구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에 담담한 어조로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저도 그런 조언 많이 들었어요. 선수협 회장에서 물러나면 즉시 다른 팀에 입단할 거라고. 하지만, 제 욕심 채우겠다고 동료들과의 약속을 저버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가뜩이나 과거 선수협에 대한 불신이 남은 터라, 저까지 임기를 지키지 않는다면 선수협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재홍이 끝까지 회장 자릴 지킨 데엔 손민한의 공(?)이 컸다. 사연은 이렇다. 2011년 12월 박재홍은 선수협 7대 회장에 뽑혔다. 당시 선수협은 권시형 사무총장이 배임수재 및 횡령에 연루돼 검찰조사를 받느라 매우 어수선했다. 여기다 권 총장을 옹호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반으로 갈라져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자칫 선수협이 해체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박재홍의 회장 당선은 사실 의외였다. 이전까지 박재홍은 ‘자기밖에 모르는 선수’ ‘이기적인 선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래선지 박재홍 자신도 회장에 당선되자 “나도 왜 내가 당선된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박재홍은 회장이 되자마자 면밀한 연구와 강력한 추진력으로 권 총장의 비리를 밝혀냈다. 권 총장의 비리가 연달아 공개되자 선수들은 “전임 집행부에 속았다”며 분노했다. 특히나 전 회장 손민한에 대한 배신감이 대단했다. 그러나 손민한은 권 총장이 구속된 이후에도 옹호 입장을 견지했고, 선수협 사태와 관련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권 총장이 실형을 선고받자 “게임사 초상사용권 계약과 여타 선수협 사업 추진은 모두 권 총장이 주도했다”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손민한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은 결국 선수들에게 선수협과 선수협 회장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박재홍이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라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선수협 회장에 취임할 때 박재홍은 “선수협은 선수들의 대표 단체이고, 회장은 선수들의 얼굴”이라며 “선수들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선수협과 회장은 ‘어떤 약속이든 반드시 지킨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신의 말을 책임지고자 박재홍은 회장 임기 2년을 채우려 했고, 은퇴에 몰리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모 베테랑 선수는 “재홍이는 프로 16년 차가 되도록 ‘자기밖에 모르는 선수’라는 평을 듣고 살았지만, 지난해 1년 동안 선수협 회장을 맡으며 이미지가 확 바뀌었다”며 “선수들 사이에서 ‘역대 최고의 선수협 회장’이란 찬사가 쏟아졌다”고 귀띔했다.
# 손민한 문자로 선수들에 사과
▲ 손민한 전 회장. 이종현 기자 |
하지만, 박재홍과 박충식 사무총장은 끝내 손민한을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당시 박재홍은 “그래도 (손)민한이는 야구 후배”라며 고소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손민한은 두문불출하며 반성하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현역으로 뛰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내비치고, NC와 접촉하며 현역 복귀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1월 중순 선수협 소속 주요 선수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지난 일을 사과하며 복귀 사전정지 작업을 펼쳤다. NC 관계자는 “손민한 스스로 선수들의 용서 없이 야구계 복귀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사과 메시지를 보낸 것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손민한의 의도와 달리 선수 대부분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현역 복귀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박재홍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박재홍은 “말만 사과문이지, ‘권 총장의 비리를 난 몰랐다’는 식의 변명이 핵심 내용”이라며 “전임 집행부 때문에 선수들이 피땀 흘려 모은 수십억 원이 날아간 마당에 그 중심부에 있던 사람이 반성 없이 은근슬쩍 현역에 복귀하려는 건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박재홍은 1월 25일 은퇴 기자회견에서 “손민한을 용서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은퇴식이 끝날 즈음 손민한을 직접 불러내 사면 조치를 취했다.
선수협 관계자는 “박 회장이 먼저 ‘민한이를 살려주자’고 제안해 박충식 사무총장을 비롯해 우리 모두 깜짝 놀랐다. 박 회장이 야구계 대화합 차원에서 손민한을 구제해주기로 마음 먹은 것으로 안다”며 “개인적 실리 대신 명예를 선택한 박재홍과 명예 대신 개인적 실리를 쫓아간 손민한을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