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28일 공개된 '들쥐'는 의문의 존재 '들쥐'에게 이름과 얼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소설가 제문재(류준열 분)가 사채업자 노자(설경구 분), 형사 순용(이규형 분)과 함께 들쥐의 정체를 쫓는 추적 스릴러다. 류준열은 자신의 삶을 빼앗긴 문재와 그의 인생을 차지한 들쥐를 모두 맡아 데뷔 후 처음으로 1인 2역에 도전했다. 류준열은 어느 한쪽에만 선과 악을 무겁게 배분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빌런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악역이 없고, 캐릭터들이 각자 자기 의지에 맞춰 살아가다 이런저런 선택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거든요. '계시록' 때도 제가 연기한 주인공은 본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지 진짜 악인은 아니에요. 문재도 마찬가지로 그가 악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놓였다기보다는 그냥 '하다 보니' 그렇게 돼 버린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자신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모두가 선인일 수도 있고, 또 모두가 악인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문재가 흥미로운 지점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처음부터 알고도 모른 척해 온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감당하기 힘든 기억을 밀어낸 채 오랫동안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믿었고, 진실을 되찾는 순간에는 자신조차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억을 되찾은 뒤의 문재까지 순진한 피해자로 남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들쥐'에게 무엇을 빼앗았는지 알게 된 뒤에도 결국 살아남는 쪽을 택한 그는 또다시 이야기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고쳐 쓰려 한다. 자신을 속였던 문재와 진실을 알고 난 뒤에도 자신을 지키려는 문재가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들쥐'라는 이름은 결말에 이르러 문재에게 더욱 선명하게 되돌아온다.

'들쥐'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류준열과 김홍선 감독이 머리를 맞대고 가장 깊이 고민한 것은 "화면 안에서는 무엇으로 문재와 들쥐를 구분하게 만들까"였다. 차이가 지나치게 선명하면 시청자가 인물보다 배우의 1인 2역 연기를 먼저 의식하게 되고, 반대로 똑같기만 하면 극의 긴장이 무너진다. 게다가 류준열이 연기하는 들쥐는 단순히 '또 다른 문재'가 아니라 그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는 서유민(박윤호 분)의 말투와 습관, 정서까지 이어져야 했다. 이처럼 거듭된 고민의 흔적은 결국 과장된 분장보다는 목소리와 눈 같은 아주 작은 곳에 남았다.
"문재와 들쥐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줄 때, 특히 들쥐의 목소리를 놓고 감독님과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처음엔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 제 목소리에 (박)윤호 씨의 목소리를 섞어 보면 어떨까 했는데 제 생각엔 배우가 직접 하는 게 시청자에게 더 와닿을 것 같더라고요. 감독님도 제 의견을 받아주셔서 목소리를 굉장히 다양하게 실험하다가 들쥐에게 잘 어울리는 하이톤으로 잡고 연기했어요. 또 다른 은은한 변화를 꼽자면 들쥐만 눈에 반점이 들어가 있는 렌즈를 끼고 있다는 거예요. 다른 분들은 잘 모르실 수 있는데 저희 가족은 보자마자 '눈에 뭐 했어?' 그러시더라고요(웃음)."
작품 밖에서는 오래 알고 지냈지만, 안으로는 이상하리만큼 늦게 성사된 만남도 눈길을 끌었다. 어쩌다 보니 문재의 조력자가 된 전직 조폭이자 흥신소 사장 노자 역의 설경구와 류준열은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과거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오랜 기간 한솥밥을 먹었지만 정작 함께한 작품은 없었다. 긴 시간 한 울타리 안에 있었던 두 배우가 각자의 길을 걷게 된 뒤에야 비로소 '들쥐'에서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서게 된 셈이다. 지나간 기회만큼 지금의 만남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류준열은 설경구와의 호흡을 묻자 "(설경구) 형님 이야기를 하려면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며 웃음부터 터뜨렸다.

2015년 데뷔해 지금까지 쉼 없이 배우의 길을 걸어온 류준열에게 '들쥐'는 단순히 새로운 역할에 도전한 작품 이상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오래 현장을 지키다 보면 스스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보다 그 노력이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어떻게 보였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 더 드물기 마련이다. 이번 작품에서 류준열은 당연하게 반복해온 고민과 태도를 함께한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그런 '드문' 경험을 했다. 그 사실 자체가 "앞으로도 지금의 방식대로 연기를 이어가도 된다"는 꽤 묵직한 응답이 돼 줬다는 게 류준열의 이야기다.
"어릴 때 엄마가 '공부 다 했냐?'고 물어보면 '다 했어!'라고 답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공부에 다 한 게 어딨어!' 이러셨어요. 그 말이 촬영 현장에서도 생각나요. 종종 제가 느끼기에 다 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거든요. 대기 시간에 피곤하다는 이유로 저 혼자 넋 놓고 있다가도 번쩍하고 정신이 들면서 '나 준비 다 했나? 다 끝내 놨나? 다라는 게 어딨어?'라고 생각하다 보면 새롭게 질문과 의문이 생겨요. 이번 '들쥐' 현장에서는 감독님도 제 그런 지점을 좋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촬영 끝나고 감독님이 '준열아, 나랑 같이 작품 해줘서 고맙다. 너 같은 배우를 처음 만나봤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고 고마웠다'고 말씀해주셨거든요. 제가 이 작품을 최대한 성의껏 열심히 했다는 걸 감독님이 인정해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말씀이 앞으로 남은 제 연기 인생에서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