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그 엔트휘슬
지금은 ‘HOLLYWOOD’로 돼 있지만 1923년에 생길 때만 해도 ‘HOLLY-WOODLAND’(할리우드랜드)로 되어 있던 할리우드 사인은, 원래는 인근 지역 개발을 위한 부동산 광고를 위해 만든 홍보물이었다. 글자의 너비는 9미터에 높이 15미터였고(현재는 가로 12미터 세로 14미터), 각각의 글자엔 20와트 전구가 20센티미터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첫 번째 L 뒤엔 작은 오두막이 있었고, 그곳에서 경비원이 상주하며 구조물을 관리했다. 그런데 1932년 9월 18일 LA 경찰서에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하이킹 중이었다는 한 여성이 할리우드 사인의 H 아래에서 시체를 발견했다고 신고한 것. 출동한 경찰은 신원 미상의 한 여성이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 외투는 곱게 개어 옆에 놓여 있었고 그 옆엔 지갑이 있었으며, 구두는 팽개쳐진 상태였다.
사인은 골반 부분의 다중 골절로 인한 신체 손상. 지갑 속에선 유서가 발견되었다. “나는 두렵다. 나는 겁쟁이다. 나는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진작 죽음을 선택했다면, 고통을 덜 수 있었을 텐데. P.E.”
경찰은 신원 미상의 사망자를 찾기 위해 신문에 유서 내용을 실은 광고를 냈다. 그 광고를 보고 한 남자가 시체 공시소에 찾아왔다. 해럴드 엔트휘슬이라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함께 살고 있던 조카가 시체가 발견되기 이틀 전인 9월 16일에 시내 약국을 들른 후 친구들을 만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선 후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라고 했다. 시체를 본 후 그는 조카의 죽음을 확인했다. 그녀의 이름은 페그 엔트휘슬, 스물네 살의 여배우였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열네 살 땐 아버지마저 뺑소니차에 의한 사고로 잃은 페그 엔트휘슬은 삼촌인 해럴드 엔트휘슬 밑에서 자랐다. 해럴드는 브로드웨이 배우인 월터 햄든의 매니저였고, 그 영향이었는지 그녀는 열일곱 살부터 보스턴 지역 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열여덟 살에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6년 동안 10작품에 출연하며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대공황 시기 브로드웨이는 힘든 시절을 겪었고, 반면 할리우드는 오히려 호황을 맞고 있었다. 엔트휘슬은 영화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1932년에 LA로 왔고, 삼촌 해럴드의 집에 묵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할리우드 사인은 1932년 페그 엔트휘슬이 자살한 이래, 한때 자살의 명소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처음에 그녀의 죽음은 대공황 시기 격동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속에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 어느 여배우가 더 이상 섭외를 받지 못하고 오디션에서도 미끄러지면서 좌절 속에 저지른 자살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저널은 그녀의 죽음을 ‘할리우드의 비극’으로 표현했고, 죽음의 장소가 지니는 상징성에 대해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기차표 값을 살 돈이 없었고,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엔트휘슬의 죽음은 비극성을 더했다.
하지만 곧 타살설이 제기되었다. 삼촌의 집에서 할리우드 사인까지는 7킬로미터의 거리. 잡목이 많고 구불구불하며 수시로 뱀이 튀어나오는 그 길을 하이힐을 신고 걸어 올라갔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엔트휘슬은 RKO 영화사와 전속 계약 갱신을 한 상태였기에 미래는 어느 정도 안정돼 있었다. 그리고 브로드웨이에서 숱한 오디션을 보면서 떨어졌던 경험을 쌓았던 그녀가 할리우드를 겨우 6개월 경험한 후 좌절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할리우드 사인을 지키는 경비원조차 그녀가 그곳에 올라가는 걸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각에선, 누군가가 그녀를 죽인 후 그곳에 던져 놓고 타살로 위장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랬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이때 그녀의 과거가 드러났다. 열아홉 살 때 10세 연상의 배우 로버트 키스와 결혼한 엔트휘슬은 결국 이혼하게 됐는데, 이미 결혼 경력이 있었고 6살짜리 아들까지 두었던 키스는 그 사실을 엔트휘슬에서 숨겼던 것. 키스는 전처의 생활비와 아들의 양육비를 대기 위해 빠듯한 생활을 하다가 큰 빚을 졌고 그를 너무나 사랑했던 엔트휘슬이 그 빚을 갚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더 큰돈을 벌기 위해 할리우드로 왔고, 결국 남편과의 관계로 인한 고통으로 자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아무튼 그녀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섬뜩한 아이러니는 그녀가 죽은 다음에 도착한, 베벌리힐스 극단에서 보낸 편지다. 극단의 차기작에서 주연을 맡아달라는 섭외 편지였는데, 제안된 캐릭터는 ‘자살하는 20대 여인’이었다. 그리고 로버트 키스의 아들인 브라이언 키스는 이후 TV의 인기 배우가 됐는데, 그의 딸인 데이지 키스는 1997년에 스물일곱의 나이로 자살했다. 그리고 두 달 뒤 브라이언 키스도 딸의 뒤를 따라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