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씨티은행은 연초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한국에서 ‘부자들이 좋아하는 은행’으로 고급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한 데다, 지난해 2조 원이 넘는 순이익을 올리자 200% 넘는 성과급 지급을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불과 한 달여 만에 분위기는 급변했다. 지난 14일 하영구 행장이 미국 뉴욕의 그룹 본사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면서부터다.
이날은 미국 씨티그룹 본사의 CEO가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최대 2만 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에 나설 계획임을 밝힌 날이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한국씨티은행은 지난해 말 120명 규모의 희망퇴직을 한 차례 실시했는데 당시의 희망퇴직도 하 행장이 그룹 본사를 다녀온 직후 이뤄졌다. 이쯤 되자 한국씨티은행 내부에서는 “2차 구조조정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퍼져나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 행장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는 미국 씨티그룹 본사가 엄청난 손실을 낸 것으로 밝혀지면서 ‘자금조달을 위해 한국씨티은행을 판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씨티그룹은 지난해 4분기에 196년 역사상 최악인 98억 3000만 달러(약 9조 8000억 원)의 손실을 냈다.
매각설의 진앙지는 해외였다. 지난 2월 20일 한 외신은 “씨티그룹이 수익성 높은 사업에 주력하기 위해 유럽 아시아 남미 등 해외 소매지점과 소비자금융 사업부를 매각하거나 폐쇄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금융권은 이 보도를 한국씨티은행 매각으로 받아들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대규모 손실을 입은 씨티그룹이 당장 팔아서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는 대상은 한국씨티은행이라는 해석이었다.
게다가 한국씨티은행 매각설은 “은행 지분의 절반을 경영권과 함께 매수자에게 넘기고 나머지 절반의 지분은 여러 명의 투자자에게 5~10%씩 분할 매각하는 방식”이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나와 있었다. 더구나 “미국 씨티그룹에서 매각작업을 직접 관장하면서 대형 은행에 인수 의사와 조건을 타진하고 있다”는 식의 진전 상황까지 함께 거론됐다.
이렇게 불이 붙은 소문은 점차 그럴듯한 배경까지 더해지며 퍼져나갔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한국씨티은행의 순익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한미은행과의 합병으로 하영구 행장이 취임하기 전인 2005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채 정체되고 있다는 점을 매각설의 근거로 들었다.
한국씨티은행의 순이익은 지난해 40% 넘게 증가했지만 옛 한미은행 시절의 이익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은행의 젖줄이자 최대의 수익기반이라 할 수 있는 자산규모는 2004년 말 총 52조 1414억 원에서 2006년 말에는 총 48조 1771억 원으로 오히려 줄었고 지난해 말에는 46조 9452억 원으로 더욱 감소했다. 같은 기간 우리은행이 총 자산을 106조 원에서 219조 원으로 두 배로 늘리는 등 다른 시중은행들이 덩치를 대폭 키운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한국씨티은행이 지점수를 줄이고 있다는 ‘매각 사전준비 의혹’도 고개를 들었다. 게다가 이 소문은 씨티그룹 일본 자회사의 사례까지 들먹이며 그럴듯한 시나리오로 발전해 나갔다. 씨티그룹이 일본 소비자금융 자회사인 씨티파이낸셜 소비자금융사업부 매각을 추진하면서 324개였던 지점을 51개로 대폭 줄인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 소문은 억지스러운 측면이 좀 있다. 한국씨티은행 지점수가 지난 2006년 말 247개에서 현재 229개로 18개 지점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지점축소를 매각 준비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단순한 지점 통폐합일 뿐 그 이상의 의미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한국씨티은행은 내부단속에 나섰다. 하영구 행장은 전 직원들에 이메일을 보내 “매각설은 근거 없는 루머”라며 “뉴욕본사나 아태지역본사를 포함해 그 어떤 씨티 조직에서도 이 같은 루머에 언급된 계획을 검토한 바 없다”고 못 박았다.
특히 하 행장은 지난해 한국에서 전년 대비 30%를 웃도는 순익 증가를 실현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4년 이후 은행 수익은 연평균 22.6% 증가해왔고 시중은행 중 최고수준의 자산건전성과 자본적정성을 유지하고 있다”며 “향후 영업의 다각화와 영업 시너지 확대를 위해 금융지주회사 설립을 적극적으로 검토, 준비하고 있다”고 독려했다.
한국씨티은행 측은 이런 상황을 경쟁 금융사들의 견제로 해석하고 있다. 한국씨티은행 관계자는 “씨티그룹의 구조조정은 수익성이 악화된 지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안다. 미국 본사는 한국씨티은행의 실적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며 “매각설은 한국씨티은행을 음해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는 이러한 매각설이 현재로서는 근거 없는 루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씨티그룹이 한국씨티은행을 매각하려면 투자은행 등 매수자를 접촉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그런 일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설령 매각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지금 판다면 자금사정이 극도로 심각하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당장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과거 은행구조조정에 관여했던 은행 관계자는 “다국적 금융그룹이 한국 지점을 매각할 때는 본사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비밀리에 진행된다”며 “한국씨티은행에서는 본사의 상황을 알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