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련 상근부회장에 LG 출신 인사가 연이어 기용되면서 전경련-LG 간에 해빙무드가 조성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13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회의 참석자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3월 4일 전경련에서는 다소 뜻밖의 인사 발표가 있었다. 이날 전경련은 이윤호 전임 부회장이 이명박 정부의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비어있던 상근부회장 자리에 정병철 LGCNS 고문이 내정됐다고 발표했다. 이날의 인사가 조금 의외였던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전경련 주변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 고문이 당초 후보군에 포함돼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를 1순위 후보로 봤던 사람은 전경련 내부에서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그룹 출신이 연이어 부회장을 차지한 사례가 극히 드물뿐더러 이번 부회장 자리는 당초 현대기아차그룹에서 ‘찜’을 해놓았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은 4대 재벌 가운데 유일하게 전경련 상근부회장을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이번에는 전경련이 현대기아차 측에게 부회장을 맡아달라고 했고 후보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는 것이 재계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정 고문이 선출되자 현대기아차 측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이에 전경련 측이 발끈하면서 양측의 신경전이 연출되기도 했다. 현대기아차 측이 부회장 인선 발표 직후 “부회장 후보를 추천해달라고 해놓고 낙마시키는 것은 무슨 경우냐”며 불만을 표출했다는 얘기가 나돌고 이에 대해 전경련 측이 “현대기아차 외에도 부회장 자리를 원하는 기업들이 많았다. 인사권을 행사하는 마당에 추천을 부탁했다는 말 자체가 난센스”라고 반박하면서 냉랭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
결국 양측의 냉전설은 조석래 전경련 회장이 직접 나서 부회장 선임 배경을 설명하면서 봉합됐다. 조 회장은 지난 5일 “그동안 현대차그룹을 포함해 여러 곳에서 인물 추천을 받은 후 가장 적임자를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사돈으로 힘을 키우고 있는 조 회장이 청한 악수는 현대기아차 측도 뿌리치지 못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은 13일 열린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10개월 만에 참석했을 뿐 아니라 한승수 국무총리 초청 만찬에서는 호스트 역할까지 해 양측의 갈등설은 일단락됐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은 이렇게 다소간의 무리수를 불러오면서까지 정병철 고문을 부회장 자리에 앉힌 조석래 회장과 전경련의 속내다.
재계에서는 ‘LG그룹과의 해빙무드 조성’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잘 알려진 대로 LG그룹은 DJ정부 시절 있었던 ‘반도체 빅딜’ 당시 LG반도체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에 넘겨준 뒤 전경련과 등을 돌렸다. LG반도체를 뺏기는 과정에서 전경련이 모종의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0년째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 (왼쪽부터) 조석래 회장, 정병철 부회장, 구본무 회장 | ||
하지만 일각에서는 다른 얘기도 들린다. 우선 구본무 회장이 이윤호 부회장 선임 때와는 달리 정병철 고문의 부회장 선임 소식을 접한 뒤 정 부회장에게 “열심히 하시라”며 격려했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이를 사실상의 지지의사 표시로 해석하고 있다.
정병철 부회장도 지난 13일 “조만간 구본무 회장을 만나 전경련에 나오시라고 말씀드리겠다”고 화답했다.
게다가 최근 전경련과 LG그룹 간에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해빙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했다. 전경련이 주최하는 자리라면 손사래부터 치던 구본무 회장은 지난해 12월 28일 열린 이명박 대통령(당시는 당선인)과 전경련 회장단과의 간담회 자리에 이례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여의도 전경련 회관을 찾은 것은 무려 8년 만의 일이었다. 전경련과 LG그룹이 ‘재결합’한다면 공통분모는 역시 하이닉스가 될 것이 뻔하다. 어떤 식으로든 하이닉스에 관한 구본무 회장의 구원(舊怨)을 달래주지 않고서는 화학적 결합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하이닉스는 매각을 앞두고 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14일 “하이닉스를 인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지만 여지는 남아있다. 매각작업의 한 축을 맡게 될 지식경제부 장관은 이윤호 전 LG경제연구원장이어서 LG그룹이 하이닉스 되찾기를 시도한다면 이 장관이 가교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라는 관측이 그동안 재계에 떠다녔다. 구본무 회장이 끌고, 조석래 회장과 정병철 부회장이 밀며, 이윤호 장관이 받쳐주는 방식으로 ‘삼각편대’가 구성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정 부회장이 선임되기 전날 하이닉스는 앞으로 5년간 진행될 IT사업 아웃소싱 기업으로 LGCNS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정보시스템과 관련된 설비는 물론 인력, 하드웨어까지 맡음으로써 하이닉스의 핵심부문을 LG가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 사업은 공개입찰을 통해 사업자를 선정했고 LGCNS는 이를 수행하기에 손색이 없는 IT전문기업이다. 하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시기가 너무나 절묘했다고 본다면 억지일까.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