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사장의 경영권 승계수단으로 글로비스에 이어 엠코가 주목받고 있다. | ||
정몽구 회장이 지난 2년간 현대차 비자금 사건 재판을 받으며 속 끓이던 와중에도 그룹의 주력도 아닌 건설계열사에 이토록 애정을 쏟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배경엔 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안정적 후계구도 확립이란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라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지금껏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경영권 승계 수단으로 여겨져 온 곳은 물류 계열사 글로비스다. 정의선 사장이 글로비스 지분 31.88%를 확보해 최대주주로 군림하고 있으며 정몽구 회장이 25.66%를 보유해 2대 주주로 있다. 재계에선 정 사장이 글로비스 지분 처분을 통해 순환출자구조를 이루는 계열사들(현대차→기아차→현대제철·현대모비스→현대차) 중 가장 주가가 낮은 기아차의 지분 확보용 ‘실탄’으로 활용할 것으로 관측돼 왔다. 현재 정 사장은 기아차 지분 1.99% 외엔 이렇다 할 핵심계열사 지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정 사장의 글로비스 지분을 모두 처분하면 당장 기아차 지분의 10% 이상 확보도 가능해 보이지만 글로비스를 둘러싼 환경이 녹록치 않다. 글로비스는 지난 2006년 3월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비자금 창구로 지목된 바 있다. 지난해엔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로부터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로 과징금 폭탄을 맞기도 했다. 총수 일가 지분이 주를 이루는 글로비스로의 물량 몰아주기가 총수 일가의 이익 편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관계당국의 눈길을 끌었다는 후문이다. 그룹 차원의 글로비스 키우기는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정 사장의 기아차 지분 매입 수단으로 글로비스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기엔 글로비스를 향한 비판적 시선들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비스 외에 정의선 사장이 핵심 계열사 지분 확보를 위한 실탄창고로 활용할 수 있는 또 다른 계열사로 엠코가 주목받고 있다. 엠코는 정 사장이 지분 25.06%를 보유해 최대주주이며 정몽구 회장이 10%를 확보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글로비스와 달리 비상장 법인이라 그룹 차원의 물량지원으로 회사 가치를 키운 뒤 상장시킬 경우 엄청난 주가 상승으로 주주의 이익 극대화를 꾀할 수도 있다. 엠코 상장 추진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5년 4월, 엠코의 유상증자 결정 무렵부터다. 당시 정 회장과 정 사장, 그리고 글로비스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기존 주주들이 모두 증자에 참여해 주식 수를 열 배 가까이 늘리면서 상장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 것이다.
엠코가 지난 2년간 현대차 현대제철 등 주력 계열사들로부터 받은 일감의 가치는 1조 원에 육박한다. 엠코의 지난해 매출액이 1조 1691억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룹 내 물량이 엠코를 키우는 절대적 요인임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엠코가 지난 2005년부터 3년간 매출액을 20%씩 꾸준히 올려오는 점 또한 계열사들의 힘 실어주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지난해 공정위의 현대차그룹 부당 내부거래 조사 당시 엠코도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9월 공정위는 글로비스 등 계열사들이 부당이익 2585억 원을 챙겼다며 현대차그룹에 631억 원 과징금을 부과했는데 엠코는 여기서 제외됐다. 이에 대해 공정위 측은 “(엠코의) 대주주 지분이 35% 선으로 크지 않다고 판단해 깊게 조사하지 않았다”면서도 “공정위 조사는 상시 감시 형태다. 물량 몰아주기를 예의 주시하겠다”며 여운을 남긴 바 있다.
정몽구-정의선 부자 지분율이 57.54%인 글로비스에 비해 지분율 35.06%인 엠코에 대한 정 회장 부자의 장악력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엠코 대주주 명부에 정몽구-정의선 부자 외에도 글로비스(24.96%) 현대모비스(19.99%) 기아차(19.99%) 등이 올라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엠코에 대한 물량 지원으로 회사 가치가 오르면 주요 주주인 글로비스의 이익 또한 늘어나며 이는 곧 글로비스 최대주주인 정 사장과 정 회장의 이익 증대로 이어지는 셈이다.
글로비스 지분구조엔 다른 계열사들이 참여하지 않고 있어 총수 일가의 글로비스 지분 처분에 따라 지배력 유지에 변동도 예상된다. 반면 엠코는 계열사들이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어 정 회장 부자가 상장 이후 지분을 모두 처분해도 경영권 유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엠코의 광고·선전이 최근 급격히 늘어난 점 또한 관심거리다. 공시에 따르면 엠코의 지난해 광고선전비는 총 38억 원이었다. 이는 기아차나 현대모비스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2006년 엠코의 광고선전비가 3억 원에 불과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년 사이 광고선전 비용을 열두 배 늘린 홍보 의지를 결코 ‘폄하’할 수 없는 것이다.
올 초 이뤄진 증권사 인수주체 선정은 정 회장이 엠코를 키우려는 의지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 사례 중 하나였다. 현대차그룹이 지난 2월 신흥증권을 인수하면서 지분 인수 컨소시엄에 현대차(14.88%) 현대모비스(8.93%) 기아차(2.08%) 현대제철(1.79%) 등 핵심계열사들과 더불어 엠코(2.08%)를 포함시킨 것이다. 매출액이 엠코의 세 배가량 되는 현대하이스코나 로템 같은 계열사들 대신 엠코가 증권사 인수주체에 포함된 배경에 정 사장이 이 회사의 최대주주라는 점이 깔려 있다는 관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난 3월 21일 기아차 주주총회에서 정의선 사장이 대표이사직을 사임한 배경엔 기아차의 장기간 실적부진이란 멍에가 깔려 있었다. 재계 인사들은 정몽구 회장이 글로비스에 이은 엠코 밀어주기를 통해 정 사장 승계에 필요한 지분 확보 발판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정의선 사장의 경영자질 시비 진화가 당면과제라는 점에 공감하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