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회장이 직접 계열사 경영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원 안은 사임한 김병훈 전 현대택배 사장. | ||
“현정은 회장은 계열사 경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지금껏 현대그룹은 현 회장의 역할에 대해 ‘전략과 조정’을 강조해왔다. 그런 현 회장이 취임 5주년을 맞아 계열사 경영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현대그룹에선 이를 ‘책임경영’이라고 했다. 변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현 회장이 지난 10월 16일 임시주총을 통해 현대증권 사내이사, 이사회 의장에 공식 선임되면서부터다. 현 회장은 이날 오후 업계 최초의 여성 전용 파이낸셜 라운지라고 할 현대증권 ‘부띠크모나코 지점’ 개점식에 참석했다. 이 점포는 여성 CEO의 상징이자 회장 취임 후 처음으로 현대증권 이사진에 진입하는 현 회장의 ‘작품’이었다.
현대증권 책임경영에 앞서 지난 9월 말 현 회장은 그룹 경영 전반에 대해서 ‘신 조직문화 4T’를 선포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4T’는 ‘Trust(신뢰) Talent(인재) Togetherness(혼연일체) Tenacity(불굴의 의지)’를 핵심 가치로 선정하고 이를 구체화하는 실천 전략과 프로그램. 현 회장은 ‘4T’를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으로 떠오른 현대택배를 시작으로 전 계열사로 확산시켰다.
지난 6일에는 1980억 원을 들여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지상 14층, 12층 건물 두 동으로 구성된 새 사옥을 매입했다고 밝혔다.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계열사들이 한 곳으로 모이면 현 회장의 실질적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질 전망이다. 이에 대해 재계 일각에서는 총수 1인지배체제의 부작용 등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벌써부터 부실 계열사 편법 지원 논란도 일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현대택배 이사회는 현대아산의 사업에 2500억 원 규모의 지급보증을 의결했다. 현대택배 자기자본의 197%에 이르는 거액이다. 이 보증은 현대아산이 경기도 양평에 짓고 있는 콘도 ‘블랙스위트’ 분양예치금 보험증서 발급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 이사회에 김병훈 대표이사 사장이 빠졌다. 그 이유는 11월 3일 공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공시에 따르면 김병훈 사장은 이사회 이틀 전인 28일자로 사임하고 31일부터 현정은 회장이 대표이사를 겸임하는 것으로 돼 있다.
현대그룹 측은 김 전 사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했다고 밝혔지만 이는 직원들도 몰랐을 정도로 전격적이었다. 김병훈 전 사장은 고 정몽헌 회장의 보성고 동기동창으로 현 회장의 신임도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인물. 게다가 김 전 사장은 지난 9월 25일 현 회장이 위기 돌파 전략으로 내세운 ‘신 조직문화 4T’ 선포식을 제일 먼저 수행하는 등 의욕을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갑자기 사임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때문에 그룹 안팎에서는 김 전 사장이 현대아산에 대한 지급보증을 반대하다 물러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대두됐다. 현대택배 경영지원본부장(전무)도 함께 그만둬 이런 관측에 힘을 실었다.
▲ 현대그룹이 매입한 연지동 새 사옥. | ||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있는 현대아산의 손실액은 연말까지 8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현대아산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건설부문을 강화, 종합건설회사로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고 콘도 건설에 뛰어들었지만 건설경기 침체가 만만치 않다. 자칫 현대택배의 동반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사실 계열사 편법 지원 논란은 현 회장이 현대증권 사내이사로 선임되는 날 불거졌다. 이날 열린 임시주총장에서 전국민주금융노동조합 현대증권지부(노조·위원장 민경윤)가 “그룹에서 현대상선과 현대증권더러 현대아산에 2500억 원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며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 이에 대해 당시 최경수 현대증권 사장은 “지원 요구는 없었다. 있더라도 법대로 하면 된다”고 밝힌 바 있다.
현대택배의 지급보증이 공시된 뒤 민경윤 노조 위원장은 “지급보증은 현대택배가 하고 자금은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에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현대증권과 현대상선의 지원이 확인되면 노조는 양사 주주로서 경영진을 배임 혐의로 고발할 방침”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노조가 예방 차원에서 그러는 걸로 안다. 현대상선이나 현대증권의 자금지원은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현대증권은 지급보증과 관련, ‘안 좋은 추억’이 있다. 이익치 전 회장은 지난 1997년 현대중공업에 현대증권 대표이사 명의의 지급보증각서를 써준 혐의(업무상 배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은 것은 물론 이에 대해 노조가 제기한 98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1심 재판부는 최근 270억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민경윤 위원장은 “이 전 회장에 대한 판결이 대기업 경영진의 불법행위를 근절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아마 김병훈 전 사장도 배임 가능성 때문에 지급보증을 거부하다 그렇게 된 듯싶다”고 말했다.
현정은 회장으로선 계속해서 주력 계열사 CEO와 좋지 않은 모습으로 결별한 것도 부담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김지완 전 현대증권 사장은 이후 하나대투증권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정익 전 현대상선 사장도 사임 뒤 ‘코드 논란’은 물론 스톡옵션 문제로 설전을 벌였고 소송으로까지 비화할 듯하다. 여기에 김병훈 전 현대택배 사장까지 석연찮게 물러나게 된 것. 현정은 회장의 친정체제 강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