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의 30%가 메이도프에게 투자한 팜비치 컨트리 클럽. | ||
황당하고 어이 없는 다단계 금융사기에 월가가 다시 한 번 휘청대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은 거액을 투자한 개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 세계 은행이나 금융기관 할 것 없이 어떻게 모두 눈 뜨고 당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번 사건을 저지른 버나드 메이도프(70)는 치밀했고 또 교묘했다. 그가 투자자를 모집하고 유혹했던 곳은 상류층들이 모이는 골프 클럽이나 그들끼리만 모이는 파티나 모임 등이었다. 그리고 메이도프는 바로 이 점을 적극 활용했다. 언제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나 먹혔던 그만의 키워드는 바로 ‘회원제’라는 마법과도 같은 단어였다.
“아무나 투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말 한마디면 누구나 넘어왔다. 실제 피해자들 대부분은 “메이도프에게 돈을 맡기면 어떤 특별한 모임에 가입된 듯한 자부심마저 느껴졌다”고 말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회원제(members only) 클럽’에 가입함으로써 자신도 ‘거물’이나 ‘특별한 존재’가 됐다는 느낌은 사람들을 메이도프에게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골프광이었던 메이도프가 주로 투자자들을 모집했던 곳은 웬만한 갑부들이나 실세들이 모인다는 뉴욕, 플로리다, 시카고, 보스턴 등의 회원제 골프 클럽이었다. 미국 내 6개 골프 클럽의 회원인 것으로 알려진 그는 특히 플로리다에 위치한 ‘팜비치 컨트리 클럽’을 주무대로 삼았다.
회원 세 명 중 한 명이 메이도프에 투자했을 만큼 이곳은 다른 어떤 곳보다 가장 피해자들이 많이 집중돼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어떤 회원들은 오로지 메이도프를 소개받기 위해서, 혹은 얼굴 도장만이라도 찍기 위해서 클럽에 가입했을 정도였다. 수백만 달러의 클럽 연회비를 지불하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메이도프의 고객만 되면 이보다 몇 배는 더 재산을 불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곳에서 메이도프는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익명의 한 클럽 회원은 “메이도프는 팜비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브로커였다. 이 지역의 거물들은 전부 그의 고객이었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을 지냈던 ‘메이도프’라는 이름에 대한 신뢰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도 일단 그에게 투자만 하면 매달 1% 내외의 안정적인 수익률이 보장됐기 때문이었다. 어떤 불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자자들의 통장에는 1년에 두어 달을 제외하곤 꼬박꼬박 수익금이 입금됐다. 어떤 회원은 “메이도프 덕분에 매년 15~22%의 고수익을 누렸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메이도프는 절대로 본인이 직접 나서서 투자자를 모집하지 않았다. 일종의 ‘신비주의’를 택했던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아내와 단 둘이 골프를 치거나 몇몇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등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었다. 떡밥을 던지는 것은 대신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가령 비공식적으로 메이도프의 중개인 역할을 했던 ‘the macher(유대어로 ‘거물’이란 뜻)’들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메이도프의 절친한 동료거나 친구, 혹은 이미 메이도프 펀드에 투자를 한 투자자들이었다.
‘거물’들은 골프 클럽이나 파티에서 수다를 떨면서 ‘메이도프’라는 이름을 흘리기만 하면 됐다. 가령 대화 중에 “얼마 전에 내 돈을 메이도프에게 맡겼는데 그 사람 아주 믿을 만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다. 매년 8~12%까지 꾸준한 수익이 나고 있다”라는 말을 한다. 듣는 사람이 귀가 솔깃해져서 관심을 나타내면 우쭐해진 ‘거물’은 곧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초대를 못 받으면 가입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손을 써볼 수는 있을 것 같다.”
▲ 칼 샤피로 | ||
때문에 어렵게 메이도프 펀드에 가입한 사람들이 자신들도 ‘그들’에 끼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버트 치알디니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심리학 교수는 이에 대해서 “투자를 하기 전이면 으레 드는 ‘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곧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열심히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던 ‘거물’들 역시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메이도프에게 속았고, 또 자신들도 사기를 당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투자자들을 모았던 경우가 많았다.
‘팜비치 컨트리클럽’의 오랜 회원이자 메이도프와 막역한 친구 사이로 알려진 칼 샤피로(95) 역시 그랬다. 의류 기업인 ‘케이 윈저’의 창업주인 샤피로는 사위인 로버트 자페와 함께 클럽 회원들을 상대로 투자자를 모집했다. 친한 회원들에게 메이도프를 소개해주면서 투자를 부추겼고,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샤피로를 찾아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샤피로 역시 이번 사건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잃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때 메이도프의 ‘거물’로 활동했던 리처드 스프링(73)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애널리스트였던 그 역시 전 재산의 95%에 해당하는 1100만 달러(약 140억 원)를 메이도프에게 투자했다가 모두 날려버리고 말았다. 40년 동안 메이도프를 알고 지냈던 친구 사이인 그는 “그만큼 그를 믿고 있었다”면서 허탈해했다. 그가 지금까지 ‘거물’로 활동하면서 모집한 투자자는 수십 명에 달했다. 5만 달러(약 6500만 원)를 피해 본 선생님부터 수백만 달러를 날린 사업가나 회사 간부 등 계층도 다양했다. 그는 “사람들이 먼저 나를 찾아와서 메이도프를 소개해달라고 졸랐다. 내가 먼저 간청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스프링의 말에 따르면 메이도프는 투자자들이 처음부터 너무 큰 거액을 맡기지 않도록 특별히 지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액 투자부터 하도록 시켜라. 처음 1~2년 동안 만족하면 그 다음에는 훨씬 더 많이 투자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메이도프의 철칙이었다.
스프링은 따로 커미션을 받지는 않았지만 메이도프가 고객으로 있는 소형 투자자문회사로부터 소정의 사례금 형식으로 돈을 받기는 했다고 말했다. 메이도프의 사기 행각이 드러나자 충격에 휩싸여 있는 ‘팜비치 클럽’의 회원들은 “사실 돈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충격은 서로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은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자신에게 메이도프를 소개해준 클럽의 친구들이나 지인들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에 더 이상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