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낸 추석선물은 예외 없이 우리 농산물로, 이희호 여사가 직접 맛을 보고 골랐다고 한다. 사진은 지난 2000년 11월 농업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 내외. | ||
이맘때면 국회의원 회관은 선물 리스트를 챙기는 보좌진들과 의원에게 선물을 전달하러 온 배달원들로 북적대게 마련. 하지만 극에 달한 정치 불신과 경제난 탓인지 이번 추석의 선물 얘기는 예년에 비해 훨씬 늦게 사람들의 입에 올랐다.
안팎의 사정상 자칫 잊혀질 뻔했던 정치권의 선물 얘기를 먼저 꺼내든 것은 ‘여의도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불리는 민주당 정대철 대표다. 그는 최근 한 기자간담회에서 도무지 스킨십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노무현 대통령의 ‘메마른 리더십’을 꼬집으며 “여야 정치인에게 추석 선물을 보내라”고 훈수를 뒀다.
청와대는 불과 하루 뒤 “여야 정치인 등 5천 명에게 지리산 복분자주와 경남 합천의 한과를 하나로 묶은 ‘국민통합형 선물’을 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청와대는 “정 대표가 잘못 알고 있었을 뿐 원래 선물은 준비돼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정치권 인사들은 정 대표다운 훈수와 노 대통령다운 응수에 모처럼 웃음지을 수 있었다.
[역대 대통령들의 선물]
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역대 대통령들은 추석과 설 등 명절 때마다 여야 정치인과 정치권 인사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국가 최고수반의 선물인지라 뭔가 대단히 비싼 것일 거란 상상과는 달리 작지만 정성을 듬뿍 담은 선물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앞선 간담회에서 정 대표는 역대 대통령들의 명절 선물 내역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봉황 문양이 새겨진 인삼이나 수삼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봉황문양이 새겨진 인삼을 주로 선물했다고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백만∼2백만원을 국회의원 회관으로 보내왔으며 집권시절 ‘멸치 공화국’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게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주로 멸치를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가장 세심하고 정성이 담긴 선물을 보냈던 역대 대통령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꼽힌다. 김 전 대통령의 선물 품목은 거의 예외없이 우리 농산물. 잣과 호두, 차, 버섯, 김, 한과 등이 주종을 이뤘다.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도 남달랐다. 이희호 여사가 3~4가지의 예비품목을 뽑아주면 청와대 직원들이 산지에 직접 내려가 견본을 사오고, 이 여사가 이를 직접 맛본 뒤 최종 낙점을 했다는 후문이다. 이 여사는 선물 포장의 규격과 색상까지 직접 챙기는 등 남다른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선물 품목이 주로 농산물인지라 이를 받은 일부 인사들은 “너무 시시하다”며 홀대받았다는 느낌을 토로하기도 했다지만, 선물이 전달되기까지 과정을 아는 사람들에겐 이는 철없는 투정일 뿐이었다.
▲ 지난 2000년 추석 때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송이버섯을 선물로 보내와 정치권이 떠들썩했다. 당시 선물을 보고 환하게 웃는 임동원 국정원장(왼쪽). | ||
대통령들의 선물을 받는 명단은 통상 대외비로 돼 있다. 명단에 빠진 인사들이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일종의 배려를 해온 것이다.
[지역 인심 좇는 정객들 선물]
대통령뿐 아니라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거쳐간 대부분의 정치인들도 명절 때마다 선물을 주고받았다. 잇단 부정부패 스캔들과 넉넉지 않은 주머니사정 탓에 많이 줄어들긴 했어도 이 같은 선물 관행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정치인들이 추석과 설, 연말 등 세 차례씩 선물을 주고 받았으며 종류도 갈비세트나 양복티켓 등 고가품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이후부터는 추석과 설 등 두 차례로 줄고 품목도 저렴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갈비세트 등 고가품은 거의 자취를 감췄고 주로 수천원, 비싸봐야 2만원 내외의 선물이 주종을 이룬다.
고가품을 밀어내고 명절선물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품목은 지역구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지역민의 온정을 느끼게 하는 지역특산물. 이는 지역의 상품 홍보효과와 동시에 지역민에게 직접적인 경제적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특히 각광받고 있다.
품목이 지역 특산물이다 보니 의원들의 소속 당별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호남 출신이 많은 민주당 의원들은 김과 미역 등을 주로 보낸다. 영남 출신 중심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멸치와 마늘, 고추 등을 주로 선물하며 자민련 의원들은 사과나 김을 주로 보낸다. ‘김당’과 ‘멸치당’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지만 이는 우리 사회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는 지역주의, 지역당 정치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품목만 들어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는 선물들도 많다. 전북 순창 출신인 민주당 정동영 의원은 순창고추장, 전남 여수가 고향인 김충조 의원은 돌산 갓김치, 전남 곡성을 지역구로 둔 김효석 의원은 곡성 약대추를 주로 선물한다. 전남 신안 출신의 한화갑 의원은 신안 김, 경기 이천의 이희규 의원은 이천 쌀, 전북 전주의 장영달 의원은 전주 유과, 전남 나주의 배기운 의원은 나주 배를 보낸다.
한나라당에서는 경북 의성 출신의 정창화 의원이 의성 마늘, 경북 안동이 고향인 권오을 의원이 안동 사과나 안동 소주, 경북 영천의 박헌기 의원은 영천 사과, 충남 보령 출신의 김용환 의원은 보령 김을 주로 보낸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안택수 의원은 예천 참기름, 경남 남해의 박희태 의원은 말린 고등어, 경북 영양이 고향인 이재오 의원은 영양 고추장, 부산 출신의 권철현 의원은 젓갈세트를 선물한다. 주진우 의원은 사조참치 회장답게 참치 선물세트를 주로 선물한다.
[낭패 부르는 선물들]
마음을 전하는 게 선물이라지만 받지 말아야 할 선물도 가끔은 있다. 정치인들 역시 아무 생각없이 선물을 주고 받았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실세’에게 지나치게 비싼 선물을 했다가 면박만 받고 되돌려받은 의원들의 얘기는 명절 때마다 각 당에서 무슨 스캔들처럼 흘러나오곤 했다.
정치인들이 선물로 곤욕을 치른 대표적인 사례는 ‘진승현 게이트’ 당시의 선물리스트. 금융권은 물론 나라 전체를 발칵 뒤집었던 진승현 전 MCI코리아 회장이 명절 때 정치권 인사들에게 17년산 발렌타인 등 고급 양주를 돌렸던 명단이 시중에 떠돌아다닌 것이다. 뇌물이라고까지 몰아붙이긴 어렵지만 선물을 받은 당사자들은 당시 분위기에선 도덕적 비난을 면키 어려웠다.
수사 과정에서 진위여부가 확인되진 않았지만 당시 진씨측에서 나왔다는 이 리스트에는 친소 관계와 영향력 등에 따라 정치인 50여 명의 명단이 1~3등급으로 나뉘어 적혀 있었다. 당시 1등급 인사에게는 양주와 한과세트가, 2등급에게는 양주 또는 한과세트가, 3등급에게는 기타 선물이 전달됐다는 후문이다. 김민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