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드라마 <호타루의 빛> | ||
얼마 전 일본의 유명배우 아야세 하루카가 영화 홍보차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녀는 영화에 앞서 2007년 <호타루의 빛>으로 이미 한 차례 신드롬을 일으켜 국내에선 제법 잘 알려진 배우. 이 드라마에서 최초로 ‘건어물녀’ 캐릭터를 연기했다. 전형적인 ‘오피스걸’인 호타루는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지만 집에 오면 후줄근한 옷차림에 오징어와 캔맥주를 달고 산다. 연애에는 도통 관심도 없다. 이런 호타루 식의 건어물녀는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많은 여성 직장인들의 하루도 호타루와 닮아 있다.
공연기획사에 근무하는 K 씨(여·29)는 늘 지쳐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집에서 회사까지 교통편이 매우 불편하다. 게다가 고질적인 정체구간이 있는 코스라 15분 정도면 갈 곳이 40분 이상 걸린다. 업무 특성상 야근도 많다.
“직장생활 3년차예요.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나름대로 부지런 떨면서 퇴근 후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 봤죠. 취미생활도 하고 연애도 하고요. 근데 불시에 야근을 하거나 만원버스에 시달리고 나면 아무 생각이 없어져요. 그저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죠. 요새는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보거나 일드(일본드라마)를 보는 게 제일 행복해요.”
K 씨도 한때 ‘불타는 사랑’을 했지만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더 이상 연애에 소비할 에너지가 없단다. 그는 “이 생활이 오래되다 보니 여가시간을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고백했다.
부모로부터의 자립, 차곡차곡 쌓이는 경력, 화려한 싱글생활…. 이 모두 다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았거나 직장 여성들에게 환상을 품고 있는 남성들이 만들어낸 날조’라고 주장하는 J 씨(여·32). 그는 혼자 살고 있다. 부모로부터 독립은 했으나 ‘자유의 기쁨’은 길지 않았다. 쌓여가는 빨래에 출근하기 바빠 미룬 설거지가 산처럼 쌓이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TV 위에 뽀얗게 덮이는 먼지를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의 몸은 접착제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는다. 밖에서는 늘 긴장 상태로 있어 빈틈 하나 없어 보이지만 퇴근만 하면 맥이 탁 풀리는 것이다.
“누가 집에서 옷을 제대로 갖춰 입나요. 드라마 보면 웃겨요. ‘싸모님’들이나 그렇게 살죠. 목 늘어난 티셔츠에 무릎 나온 운동복은 기본이에요. 혼자 사니까 속옷도 제대로 안 갖춰 입을 때가 더 많죠. 집에 오면 제일 먼저 옷 벗어던지고 렌즈 빼고 안경 끼고요.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어 상투 틀어요.”
그는 가스레인지를 쓸 일이 거의 없다. 요리를 안 하기 때문이다. 대신 즉석식품을 데우는 전자레인지가 열심히 제몫을 하며 돌아간다. J 씨는 “혼자만 그런 것 같았지만 알고 보니 주변의 싱글 친구들도 대부분 똑같았다”고 말했다.
‘귀차니스트’가 된 이들 건어물녀는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가 고역이다. ‘만남’에 들이는 준비 시간, 수다 등 모든 것이 귀찮을 뿐이다. 친구들은 물론 연애도 사절인 경우가 많다. 광고 디자이너인 L 씨(여·30)는 집에서 혼자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주말이면 불러내는 친구들이 오히려 귀찮다.
“금요일 퇴근 전이면 설레죠. 저도 직장인인데 주말이 왜 좋지 않겠어요. 근데 막상 또 약속을 잡자니 성가신 거예요. 집에 가서 다운받은 드라마랑 영화만 줄곧 보면서도 친구들이 ‘뭐 하냐’고 하면 밀린 일을 한다고 하거나 아프다고 핑계를 대죠. 그냥 혼자 노는 게 제일 편하고 즐겁더라고요.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느냐고 묻는데 익숙해져서 별다른 감흥이 없어요.”
그는 얼마 전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꼭 한번 만나보라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소개팅 약속까지 잡았다 하루 전 취소했다. 남들이 보기에 뭐 하나 빠질 것 없어 소개팅 건이 많이 들어오지만 혹하다가도 약속 날짜가 다가오면 밀려오는 압박감에 이렇게 취소하길 반복하고 있다.
건어물녀는 타인이 자신의 삶에 끼어드는 것에 익숙지 않다. 그래서 연애에도 서투르다. 오랫동안 철저히 독신 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진정한 사랑이 와도 놓치기 일쑤다. 온라인 서점에 근무하는 Y 씨(여·31)는 연하 남자친구를 사귀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을 했다. 연애 전에도 항상 데이트 비용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고민이던 Y 씨. 친구들은 “그런 것은 고민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충고했지만 막상 실제 연애를 시작하자 매사에 갈등이었다. 게다가 연하의 남자라 머릿속은 더 더욱 복잡해졌다.
“한번은 칵테일 바에 갔었어요. 마시면서도 계속 내가 내야 하나, 그냥 모른 척하고 있을까 고민했죠. 아무리 연하라도 굳이 제가 낼 필요는 없었는데 연애를 안 하다보니 남한테 뭘 얻어먹을 기회가 없어서 그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란 생각보다는 ‘그래도 동생이니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제가 낸다고 했더니 그가 낸다고 하는 거예요. 계산대 앞에서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따로 내자고 하고 1만 원을 건네주고 왔어요.”
지금도 전화가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뭐 하느냐고 물으면 어디까지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건지도 감이 안 온다는 Y 씨. 낯간지러운 상황이 연출되려고 하면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것도 여전하다.
많은 여성 직장인들이 타인과 심각한 관계가 되는 것 자체를 꺼리거나 모처럼 건어물녀를 탈출한다고 해도 연애 초보티를 팍팍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호타루의 빛> 작가 히우라 사토루는 ‘책에 나온 리얼한 건어물녀의 사례를 찾느라 힘들었을 것 같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천만에요. 주변의 친구들 대부분이 이렇게 살고 있어요. 게다가 만화책을 본 독자들이 공감 메일을 수없이 보내주셔서 오히려 넘치는 사례들 중 골라서 반영시켜야 했죠.”
이것이 현실이다. 골드미스니 알파걸이니 하고 떠들지만,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
나도 혹시 건어물녀?[체크리스트]
□ 집에 돌아오면 바로 ‘추리닝’ 차림이다
□ 쉬는 날에는 노 메이크업 & 노브라
□ ‘귀찮아, 대~충, 뭐 어때’가 입버릇
□ 술에 취한 다음날, 정체 모를 물건이 방에 있다
□ 제모는 여름에만 하면 된다
□ 현관 앞에서 잊은 물건이 있으면 신발을 신은 채 까치발로 가지러 들어간다
□ 메일과 문자의 답장은 짧고 늦게
□ TV를 보며 혼잣말을 하곤 한다
□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게 없다
□ 라면을 냄비 채 놓고 먹는다
□ 널어놓은 세탁물은 개기 전에 그냥 입는다
□ 최근에 가슴 설렌 적은 계단을 오를 때 정도다
□ 최근 한 달간 일이나 가족 이외의 남성과 10분 이상 얘기한 적이 없다
□ 솔직히 이것을 전부 체크하는 게 귀찮다
□ 솔직히 질문에 체크하면서도 자신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과]
▷0개: 멋진 여성
▷1~3개: 괜찮은 편
▷4~7개: 건어물녀 예비군
▷8~11개: 건어물녀 인정
▷12개 이상: 초 건어물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