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대여금 소송’에서 돈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사진은 지난해 돈봉투 의혹 관련 국회의장직 사퇴 후 국회를 나서는 모습. 일요신문DB
이후 이 씨는 A 씨로부터 “박희태 의원의 선거비 빚이 많이 있으니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씨 또한 1998년경부터 박 전 의장에게 자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씨는 “5공을 시작으로 문민정부에서 법무부 장관까지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던 박 전 의장이 DJ 정부 들어 후원금도 적게 들어오고 해서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들었다”며 “박 전 의장이 자신의 사무장인 A씨를 ‘도와주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도와준다는 것은 자금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 전 의장과 동향인이기도 했던 이 씨는 이후 때때로 박 전 의장에게 찬조금을 냈고, 큰돈의 경우에는 빌려주었다가 여러 차례 변제받기도 했다. 이 씨는 박 전 의장 명의의 차용증을 받으면서 직접 돈을 지급하거나, 박 전 의장의 고향 후배가 경영하는 회사들의 어음을 받고 할인을 하는 형태로 돈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돈거래를 할 때는 항상 A 씨를 통해서 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2001년 7월부터 이 씨와 A 씨가 거래한 금액의 규모는 30억 원가량. 그런데 2003년 12월부터 2004년 9월까지, 8회에 걸쳐 A 씨가 차용한 4억 1500만 원이 변제되지 않았다. 이 씨는 박 전 의장의 변호사 명판과 도장이 날인된 차용증을 받고 2004년 6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총 2억 5800만 원, (주) 통일산업은 박 전 의장의 변호사 명판과 도장이 날인된 약속어음 등을 받고 2003년 12월부터 2004년 3월까지 1억 5600만 원을 빌려줬다.
이 씨는 A 씨가 돈을 갚지 않자 박 전 의장에게 직접 대여금 지급을 요청했다. 이 씨는 “변제받지 못한 4억 1500만 원 이전에도 금전적인 거래가 있었고, 금전적인 거래가 있을 때면 박 전 의장으로부터 직접 ‘고맙다’는 전화를 받기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당 금액을 돌려달라는 이 씨에게 박 전 의장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차용증과 약속어음이 모두 위조 됐으며 심지어 A 씨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이 씨는 결국 2007년 3월 박 전 의장을 상대로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에 대여금 청구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6년간의 지루한 소송전이 시작된 것이다.
재판 결과 1심은 “정치인이자 변호사인 박 전 의장이 자신의 정치 및 변호사 활동을 보조하는 A 씨에게 자신의 인장까지 보관시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박 전 의장이 A 씨를 통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서 “박 전 의장은 이 씨에게 1억 8000만여 원, (주)통일산업에 1억 900만여 원 등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는 사이 박 전 의장은 1심 판결이 선고되기 전인 2009년 경남 양산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여섯 번째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2심이 진행되던 2010년 6월에는 박 전 의장이 18대 국회의장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대법원장과 더불어 3부요인으로 꼽히는 국회의장을 상대로 진행되는 재판인 만큼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2심 과정에서는 양쪽에서 수많은 증인 및 증거방법을 동원했다. 2년여 만에 판결이 선고된 2심은 원심 판단이 그대로 인정되는 수준이었다. 2심도 ‘타인을 사무에 종사하게 한 자는 피용자가 그 사무집행에 관해 제삼자에게 입힌 손해를 배상하도록 규정’한 민법 제 756조에 따라 박 전 의장의 사용자 책임을 70% 인정해 이 씨에게 1억 8000만 원, (주)통일산업에 1억 7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양측이 상고했고 대법원에서 상고심이 진행됐다. 그리고 지난 6월 28일, ‘예상외’의 판결이 나왔다. 박 전 의장의 책임을 70% 인정한 원심이 깨지고 사건은 대전고법으로 파기 환송된 것.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씨 등이 A 씨가 피고 명의로 차용증을 작성하거나 약속어음에 배서한 것이 실제로는 변호사 사무장이나 국회의원 지역선거구 관리자로서의 사무집행의 범위 내에 속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거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알 수 있었는데도 고율의 이자 수익을 얻으려는 욕심 등 때문에 일반인에게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현저히 위반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며 “공편의(공평하고 서로 편리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원고들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이에 이 씨 측 변호인은 “A 씨가 차용한 돈이 피고인 박희태를 위하여 사용하였음을 인정할 자료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판결이 났다. 하지만 A 씨는 지난 2월 형사판결에서 ‘박희태의 선거지원업무를 하면서 차용한 채무를 변제하기 위하여 이 사건의 범행에 이르게 되었고, 위조한 약속어음을 담보로 차용한 금원은 모두 박희태가 주도하는 주부대학 운영비로 사용했다’고 했다”며 “민사에서 ‘사용자 책임’에 있어 승소한 부분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오는 경우는 아주 이례적이다. ‘사용자 책임’에 있어 해태(게으름)하지 않았다는 입증은 사용자 측에서 해야하는 부분이다”고 말했다.
<일요신문>은 이 사건과 관련해 박 전 의장 측의 입장을 듣고자 연락을 취했으나 닿지 않았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