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연말 연초는 성과급 시즌이다. 또래 직장인 두셋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성과급이 화제에 오른다. 떡값 수준의 적은 금액을 지급하는 곳도 있지만 대략 한 달치 월급 이상이 한꺼번에 생긴다. 1년간 고생해서 얻은 정당한 대가라도 막상 손에 들면 공돈이 생긴 것 같아 쉽게 쓰게 된다. 음향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N 씨(29)는 요즘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급 때문에 홈쇼핑 사이트를 들락거린다.
“전반적으로 불황이었잖아요. 이쪽 업계도 마찬가지여서 지난 한 해 회사차원에서도 큰 재미를 못 봤습니다. 연봉은 당연히 동결이었죠. 성과급은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지가 떴어요. 기본급의 150%를 지급한다는 거예요. ‘서프라이즈’죠. 기대하던 차에 받는 거라면 액수에 만족 못했겠지만 아예 없을 거라고 생각하다 받게 되니 더 좋더라고요. 연봉 동결에 대한 위로금 수준이지만 당장은 기분이 좋아서 카메라 장비를 마련할지 노트북을 살지 고민입니다. 용돈이 생긴 것 같은 기분에 저축보다는 사고 싶었던 물건부터 보게 되네요.”
물류 회사에 근무하는 M 씨(여·26)도 예상치 못한 성과급에 요 며칠 출근이 즐겁다. “성과급은 대기업 아니면 어느 정도 규모 있는 회사나 받는 건줄 알았죠. 사실 영세한 회사나 크지 않은 회사는 성과급이 전무하잖아요. 저도 잘 알고 입사한 마당에 불만을 표시하지도 않았는데 월급의 80% 정도 지급됐어요. 남들 볼 때는 적은 금액이고 갖고 싶었던 가방 하나 살 정도의 액수지만 성과급 하나로 한 주가 내내 즐거워요.”
무역회사 말단인 H 씨(29)도 마찬가지다. 지치고 힘든 일상에 성과급은 단비 같다.
“직장생활 다 힘들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마에 ‘참을 인’자 새겨가면서 일하시는 분들 많을 텐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각할까봐 졸린 눈 비비고 일어나서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하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보고하고 선배들 뒤치다꺼리하다가 하루가 갑니다. 정작 내 일은 하나도 못하고 퇴근 시간 가까워도 갈 생각도 못하는데 집안일로 골치 아픈 상사가 한잔하자고 하면 거절도 못하고 노래방까지 가서 열심히 놀아줘도 다음날 되면 별 것 아닌 일로 욕먹습니다. 월급 받아도 카드 값 내고나면 남는 것도 없고 매일 듣는 선배와 상사의 질타에 올해까지만 하고 관둬야지, 생각하죠. 버틴 끝에 연말 돼서 통장에 찍힌 성과급 보니 그래 한 해만 더 다니자고 참게 됩니다. 다들 이렇게 1년 가고 2년 가는 거 아니겠어요.”
이런 성과급 때문에 속상한 직장인들도 있다. 버팀목이 되기는커녕 의욕상실에 이직까지 결심하게 된다고. 금융회사 2년차에 접어드는 J 씨(여·26)는 이직을 위해 토익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성과급 때문에 한마디로 ‘빈정 상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막내라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속상하네요. 성과급 크게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다른 분들은 돈 잔치 수준인데 전 한 푼도 못 받았어요. 제 위치에서 누구한테 따지거나 하소연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맘 털어놓을 수 있는 상사한테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더니 윗사람한테 어필하는 부분이 적었다고 그러시더군요. 한마디로 핑계죠. 맡은 일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또 뭘 했어야 하는지 어이없었습니다. 성과급이란 게 직원들 사기진작 차원이 아닌 윗사람들 배불리기라는 걸 얼핏 들었지만 막상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이니 절감하겠어요.”
같은 금융권인 K 씨(35)도 입금된 성과급 때문에 비애감을 맛보는 중이다. 외국계라 철저하게 능력제로 차등 지급 되는 건 알지만 심하게 차이 나는 액수가 공감가지 않는다.
“부장급인 상사는 월급 10개월치가 한꺼번에 지급됐습니다. 대략 3000만 원이 좀 넘어요. 저보다 직급이 높은 분이긴 하지만 이뤄낸 성과에 비해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은 기대했는데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액수였어요. 능력이나 실적 면에서 크게 차이 난다고 생각은 안 했는데 결과가 이러니 일할 맛이 안 나네요. 직장생활 뭐 있습니까. 연말 성과급 챙기고 남들만큼 했네 하는 생각하면서 충전하는 건데 의욕이 확 떨어집니다.”
성과급 액수가 적든 많든 일단 받으면 잘 쓰는 것도 중요한 법이다. 알차게 쓰는 것도 능력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L 씨(40)는 연초 성과급 나올 때가 되면 경리담당한테 부탁을 한단다.
“성과급이라고 말하기도 창피하지만 이때가 되면 경리담당한테 용돈 계좌로 넣어달라고 부탁해요. 월급 나오는 건 모두 집사람한테 가고 따로 용돈 받아 생활하는데 그것만 갖고 후배들 술 사고 밥 사고 사회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이 돈 나오면 적어도 상반기는 쪼들리지 않고 따뜻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대신 명절 전이니까 한 20만 원 정도 노란 봉투에 넣어서 떡값이라면서 아내한테 주면 의심받지 않고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듣지요.”
성과급을 받아들고 백화점으로 달려가거나 용돈으로 쓸 수 있는 건 나은 경우다. 많은 직장인들이 사실상 빚을 갚는 데 성과급을 사용한다. 헤드헌팅 전문기업 HR코리아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도 응답자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성과급 사용처를 ‘부채상환’이라고 답했다. 인테리어 회사에 근무하는 P 씨(41)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생활비는 물론이고 아이들 교육비로 지출되는 부분이 만만치 않습니다. 평소 월급으로 해결하기에는 벅차지요. 소득을 초과하는 부분이 있지만 지출을 줄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계속 마이너스로 통장을 유지하다가 연말에 성과급이 들어오면 한꺼번에 빚을 갚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다시 또 마이너스가 되겠지만 일단 성과급으로 빚잔치를 하면 한두 달은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외국계 기업에 근무한다는 한 네티즌은 성과급이나 보너스는 직원들의 사기와 충성도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인터넷 게시판에 남긴 경험담은 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샀다. 그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막상 확인해보니 월급 두 달분 이상의 액수가 입금돼 있었고 명세표 안에 사장이 직접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면서 “편지에는 ‘회사가 오랫동안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건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간부들과 경영진은 평소 여러분 덕에 좋은 급여로 일하고 있으니 특별 보너스 한 번 적게 받는다고 문제 되지 않습니다. 좋은 결과의 주역인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더 받아달라’고 써 있었다”고 밝혔다. 성과급을 ‘제대로 써먹는’ 회사가 아닐까 싶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