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미첨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낼 때 여배우 릴라 리즈(오른쪽)를 만나 데이트를 하며 종종 함께 마리화나를 피웠다.
기회는 1944년에 왔다. RKO 스튜디오에서 정식 계약을 맺은 것. 그리고 전쟁 영화인 <스토리 오브 지.아이.조>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곧 스타덤에 올랐다.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 로버트 미첨에게 가장 큰 불만을 지닌 사람은 1940년에 결혼한 아내 도로시 스펜서였다. 그녀는 할리우드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했다. 미첨은 돈을 벌면 다 써버리고 미래를 전혀 대비하지 않는 스타일이었고 그가 스타가 되자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미첨은 당시 불법이었던 마리화나를 종종 피웠으며, 밤마다 파티에서 흥청망청 어울렸고, 많은 여자들이 미첨에게 추파를 던졌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말에 일어났다. 스타의 아내이긴 하지만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도로시는 살림을 하면서 돈이 필요할 때마다 미첨의 돈을 관리해주던 폴 버먼에게 연락을 했다. 버먼은 미첨의 재정 담당 매니저이자 절친이기도 했다. 그런데 버먼과 연락이 되지 않았고, 결국 직접 은행에 가게 된다. 한때 5만 달러에 달하던 잔고엔 달랑 58달러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남편에게 이야기했지만 미첨은 친구인 폴 버먼을 추궁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불만이 쌓여가던 도로시는 친정 식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미첨의 장인과 장모는 사위의 돈에 대한 무개념에 크게 놀랐고 미첨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진료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사람 좋기로 유명한 미첨이긴 했지만 심리적으로 그는 ‘과잉 호의증’, 즉 주변인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허용적이고 친절하며 호의를 베푸는 일종의 정신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사냥꾼의 밤>의 한 장면.
익명의 누군가에 의한 위협, 비어버린 은행 잔고, 여전히 그의 주변을 맴도는 교활한 친구들…. 미첨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빠졌고 도로시는 아이들을 데리고 동부의 델라웨어에 있는 친척 집으로 함께 가서 쉬자고 했다. 그렇게 동부 지역으로 갔을 때, 미첨은 뉴욕에서 당시 최고의 제작자였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데이비드 O. 셀즈닉을 만나 새로운 프로젝트 제안을 받았고 다시 LA로 돌아왔다. 하지만 항공 산업의 거물로 당시 할리우드에 진출하던 하워드 휴즈는 미첨의 신작을 준비 중이던 RKO를 인수하려고 했고, 그러면서 촬영은 계속 미뤄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자 미첨은 가족에게 돌아오라며,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부동산업자인 로빈 포드를 만났다.
하지만 포드와의 만남은 로버트 미첨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부동산업을 하며 할리우드 배우들과 어울리던 포드는 릴라 리즈라는 젊은 여배우를 미첨에게 소개해준 것. 나이트클럽에서 시비 붙기 일쑤이며 자살 시도 경험도 있던 리즈는 마리화나로 불안한 정신 상태를 안정시키곤 했는데, 미첨은 그녀와 그저 재미로 데이트를 시작해 종종 함께 마리화나를 피웠다. 그리고 1948년 8월 31일 밤 10시 리즈의 집에서 로빈 포드와 함께 마리화나 파티를 하던 미첨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사건이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