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돈웅 의원이 SK측으로부터 1백억원을 전달받은 최 의원의 동부이촌동 아파트 지하주차장. 임준선 기자 | ||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 인적이 뜸한 저녁 시간대에 쇼핑백을 가득 실은 검정색 세단이 미끄러지듯 주차장으로 들어온다.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사내가 세단에서 나와 주차장 한켠에 미리 도착해 있던 또다른 승용차로 가까이 다가간다.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다가오자 승용차 뒷자리 창문이 소리없이 내려간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사내가 자신의 세단으로 돌아가는 사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서는 트렁크가 ‘덜컹’하며 열린다.
사내는 자신의 차에 가득 차 있는 비닐 쇼핑백을 트렁크로 재빨리 옮겨 싣고,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 나간다. 세단이 빠져 나감과 동시에 승합차 한 대가 승용차로 다가온다. 승합차에 타고 있던 사내들은 승용차 트렁크에 실려 있는 쇼핑백을 재빨리 승합차로 옮겨 싣고 주차장을 빠져 나온다.
영화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 상황은 지난해 11월,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다. 다름 아닌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이 지난해 11월 SK측으로부터 1백억원의 대선자금을 제공받는 과정에서 동원된 수법이다.
최돈웅 의원의 대선자금 수수 방법이 구체적으로 알려지면서 정치자금 전달수법이 새삼 세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1백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거금이 모두 현금으로 전달됐다는 점도 자금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왔는지를 웅변해주고 있다. ‘첩보영화’를 방불케하는 기상천외한 정치자금 제공수법을 살펴본다.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수법은 금액의 크고 적음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돼 온 것으로는 ‘사과상자’를 이용한 전달이 있다. 특히 추석이나 설 등 명절을 전후해 ‘떡값’ 명목으로 정치자금이 제공될 때 즐겨 이용되는 방법이다.‘사과상자’는 외부인의 눈에 띄었을 경우에도 크게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또 한 상자에 통상 현금 2억원을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규모의 자금을 전달할 때 애용되고 있다.
YS시절 핵심 당직자를 보좌했던 A씨는 “명절이 가까워지면 으레 영감(의원)이 계보 의원들에게 사과상자를 돌리곤 했는데, 가까운 핵심인사에게는 ‘사과상자’를 보내고, 조금 덜 가까운 인사에게는 ‘귤상자’를 보냈다”며 “사과상자에는 현금 2억원이, 귤상자에는 현금 1억원이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또 “선거 때도 ‘사과상자’가 몇 번씩 내려가곤 했는데, 선거 막바지에는 몇천만원씩 현금이 들어가는 ‘마대자루’가 종종 이용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사과상자’나 ‘귤상자’가 억대의 자금을 제공하는데 이용된다면, 천만원대의 자금을 제공하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동원될까. 15대 국회 이래 의원 보좌진으로 있는 B씨는 “회관으로 직접 돈을 들고 찾아오는 경우에는 쇼핑백이나 박카스 박스가 주로 애용된다”며 “쇼핑백에는 현금 5천만원이 포장된 상태로 들어가고, 박카스 박스에는 정확히 1천만원이 들어간다”고 전했다. ‘박카스 박스’는 정치인들에게 전달되는 경우 외에도, 정치인들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조직원들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주로 사용된다고 한다. 1천만∼2천만원씩 ‘활동비’를 지급하는 방법으로 ‘박카스 박스’만큼 오해받지 않고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
정치인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 ‘직접 전달’이 그것이다. 정치권에 제공되는 자금의 경우 ‘눈먼 돈’이란 인식이 팽배, 배달사고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또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겼을 경우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대면 전달’의 원칙이 유지된다고 한다. 자금 전달 과정에 많은 사람이 개입하게 되면 그만큼 ‘보안’이 깨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안’을 각별히 신경쓰다 보니, 자주 애용되는 장소가 ‘호텔’이다. 특히 지하주차장에서 곧바로 객실로 직행할 수 있는 ‘호텔’이 즐겨 이용된다. 전직의원 C씨는 “상대방이 호텔에 방을 잡아 놓고 전화를 걸어오면, 열쇠만 받아서 적당한 때에 가방만 들고 나오면 됐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호텔’을 이용하는 방법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와 객실 복도에 설치돼 있는 CCTV가 문제였다. 정치인들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 가방을 들고 들어간 사람과 가방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다른 장면이 찍혀 있는 CCTV 화면을 제시하면 꼼짝 못하고 자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지하 주차장이나 한강 둔치 등 인적이 뜸한 장소가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
정치권에 수많은 자금이 제공될 것이란 의혹은 무수히 많지만, 실제로 그 실상이 공개되는 예는 드물다. 왜 그럴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데 있다. 정치자금과 관련된 인사가 모두 한 묶음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전직의원 D씨의 설명. “일단 기업 오너가 자금 전달을 지시할 때는 핵심 심복에게 그 일을 맡기기 마련이다. 그 핵심 심복이 돈을 가져오면 돈을 받는 정치인은 그 돈을 다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가져 온 돈의 절반가량을 그 자리에서 뚝 떼어서 전달하러 온 인사에게 돌려준다. 그렇게 되면 절대 ‘보안사고’가 일어날 일은 없다.
만약 다른 이유로 수사나 조사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그 핵심 심복이 모든 것을 뒤집어 쓰면 오너나 돈을 받은 정치인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또 종종 배달사고다 뭐다 하는 얘기가 대부분 이런 경우가 많고, 때로는 전달자를 오너나 정치인이 섭섭하게 대접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금융실명제 이전에는 주로 가·차명계좌가 정치자금 제공 루트로 활용되곤 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이후 이 같은 전통적인 방법은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렵게 됐다. 이 때문에 새롭게 도입된 방법이 ‘주식’을 통한 우회 전달 방식이다.
예를 들어 기업 오너 E씨가 정치인 F씨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자 할 경우, E씨는 회사 임직원 또는 측근·친인척 명의로 위장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헐값 또는 무상으로 F씨에게 제공하고, 이를 다시 회사돈으로 비싸게 주식을 매입하는 방식이다. 문제가 생길 경우 F씨는 ‘재테크’라는 명분이 있고, E씨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회사 주식을 매입했다는 명분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발각되지 않을 수 있다.
위와 같은 ‘주식’을 이용한 정치자금 제공은 IMF체제 이후 ‘벤처 열풍’이 불면서 새롭게 도입된 방식으로 현재에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상품권’ 또는 ‘기프트 카드’ 등 ‘신용카드’를 활용한 정치자금 제공수법 등도 활용되고 있으나, 여전히 단위가 큰 규모의 정치자금은 ‘사과박스’를 활용한 현금 전달이 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