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지난 10월30일 기자회견을 갖고 SK비자금 파문과 관련해 국민 앞에 사과하고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처럼 이 전 총재에게 시련이 닥쳤으나 일부 측근들 사이에선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들은 ‘위기가 곧 기회’라는 인식을 내세운다. 온실 속의 정치인이 아니라 탄압 받는 정치인으로 새롭게 각인될 수 있는 기회라고 보는 시각마저 존재하고 있다.
이 전 총재 스스로도 현실에 순응하는 듯 보이다가 때론 현실에 맞서 싸우려는 집착과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이 전 총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이 전 총재의 지난 10월30일 기자회견은 여러모로 의미있게 받아들여졌다. 이 전 총재는 대국민사과를 하면서 여러 대목에서 비장한 심경을 드러냈다. 또 한나라당에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저는 평생을 학과 같이 살기를 동경했다. 정치에 들어와서도 대통령이 된다면 법과 원칙이 바로 선 나라,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그러나 진흙탕과 같은 정치의 마당에서 저의 이런 꿈은 허망한 꿈이 되고 말았다.
저는 지금까지 제 삶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던가, 참담한 심정으로 되돌아 본다”는 대목은 이 전 총재의 회한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다. 이 전 총재는 자신의 꿈이 현실에서 물거품으로 변한 데다 지금처럼 어려움을 당하게 된 처지를 못견뎌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전 총재의 마음속에 숨겨진 못다한 이야기는 당에 대한 분발 촉구로 이어진다. 이 전 총재는 기자회견문에서 “이 어려운 시기는 오직 용기와 단합만이 우리를 구할 것이다. 서로를 비방하고 헐뜯을 것이 아니라 서로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해 주기 바란다. 이번 일이 당이 새롭게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밝혔다.
이 전 총재가 한나라당의 단결과 분발을 촉구한 것을 두고 당내에선 논란이 일었다. 최병렬 대표의 일부 측근들은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들은 이 전 총재가 아직도 ‘총재인 줄 착각하고 있다’고 보고, 이 전 총재의 이 같은 표현이 거꾸로 욕심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 전 총재의 이날 회견의 압권은 역시 “감옥에 가더라도 제가 가야 마땅하다”는 표현이다. 이 전 총재는 당초 “내가 죽어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이란 보다 비장한 표현을 쓰려다 측근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 전 총재의 기자회견문 내내 녹아있는 이 같은 비장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당의 한 관계자는 이 전 총재에게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전 총재가 실제 감옥에 가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란 분석도 많다. 최근 이 전 총재가 공천 배제 문제로 사이가 틀어졌던 김윤환 전 의원의 서울 방배동 집에 찾아가 3년 만에 화해의 만남을 가진 것도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주변정리’ 성격이 짙다는 것.
일각의 시각처럼 이 전 총재가 검찰조사를 받고 사법처리를 당하게 된다면 이것이 곧 이 전 총재에겐 시련이자 새로운 기회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전 총재가 정국의 가장 중요한 불씨로 각인될수록 또 다른 ‘불씨’가 살아날 수 있다는 역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국면은 이 전 총재가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사태 진전에 따라선 이 전 총재는 정국의 흐름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이 전 총재님은 일단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신다. 이번 사건이 마무리되면 미국으로 가는 것이고, 마무리되지 않으면 검찰로 간다. 순간순간 역할을 찾아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이 전 총재는 지난달 20일 귀국 이후 측근 및 대선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와 함께 사태 파악과 대응을 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경식, 김기배 의원 등 측근 의원들이 이 전 총재 자택에 찾아갔고, 홍사덕 총무도 들렀다. 이번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김영일 전 사무총장도 이 전 총재를 수차례 만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전 총재는 귀국 당시만 해도 상당히 격앙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 총재는 주변 인사들과 여러 차례 만나는 과정에서 분노보다 적절한 대응책을 찾는 데 주력했다.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의 시기선택도 이 전 총재가 직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전 총재는 뭔가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절박성을 느끼고 있던 셈이다.
이 전 총재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계를 떠났는데 정계복귀 문제는 저와 관련해 나올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계복귀 논란도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이번 사건으로 이 전 총재의 복귀는 사실상 끝났다”고 분석했지만 정반대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어찌 됐든 이 전 총재가 정치의 한 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 됐고, 자연스레 투쟁의 선두에 서게 된다면 정국은 불가피하게 ‘노무현 대 이회창’ 구도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다.
‘노 VS 창’ 대결구도는 이 전 총재에게 기회일 수 있다. 반대로 이 전 총재는 불법 대선자금 운용의 당사자로, 구태정치의 비난을 한꺼번에 떠안으면서 궁지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전 총재는 이제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다. 원래 11월 초 출국했다가 내년 2월 영구 귀국예정이던 이 전 총재는 SK비자금 사건 탓에 더 이상 출국할 일이 없어질지 모른다. 그만큼 국내 복귀시기가 빨라지는 셈이다. 이 전 총재는 어쨌든 대선자금 및 특검 정국의 가장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다.
김영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