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대통령 암살 미수에 그친 존 힝클리 주니어.
이 영화를 본 수많은 관객들 중엔 콜로라도에 사는 존 힝클리 주니어라는 20대 초반의 청년이 있었다. 정유업을 하는 아버지 존 힝클리는 선교 단체인 월드비전의 미국 지부 회장을 맡을 정도로 사회적 신망을 지닌 인물이었고, 아들인 힝클리 주니어는 고등학교 시절 모든 스포츠에 능했으며 학급 리더를 두 번이나 맡을 정도로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197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74년부터 1980년까지 6년 동안 텍사스 공대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끊임없이 뭔가 시도했고 그럴 때마다 휴학을 했으며, 집에서 받은 돈으로 낯선 도시로 떠난 후 얼마 후에 빈털터리로 돌아오곤 했다. 작곡가가 되기 위해 LA에 갔지만 소득 없이 돌아오는 식이었다. 실패가 거듭되자 그는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어린 창녀 아이리스로 출연한 조디 포스터.
처음엔 항공기를 납치하거나 포스터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는 것 등을 생각했던 그는 <택시 드라이버>를 떠올렸다. 사실 이 영화는 197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지 월레스를 암살하려 했던 아서 브리머의 일기를 토대로 한 작품이다. 영화에서도 트래비스가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려 하는데 힝클리 주니어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JFK 암살에 대한 자료를 모으며 당시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내슈빌에선 총기를 소지한 상태로 경호원들에게 체포되기도하지만 풀려났고 그의 예비 범죄 행위는 계속되었다. 대통령은 바뀌었고 1981년 3월 30일 워싱턴 DC의 힐튼호텔 앞에서 연설을 마치고 나오는 레이건에게 모두 여섯 발의 총을 쏘았다. 대통령은 가슴 부분에 가벼운 총상만 입어 죽지 않았고, 범행을 저지르고 그 자리에 서 있던 힝클리는 곧 체포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디 포스터의 사랑과 존경이다. 그 두 가지를 가질 수 없다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나폴레옹과 조세핀 같은 역사적인 커플이며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로맨스의 관계다.”
<택시 드라이버>
이후 조디 포스터에게 ‘힝클리’라는 고유명사는 금지어가 되었다. 그 어떤 기자도 인터뷰에서 ‘힝클리’라는 이름을 언급해선 안 됐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포스터는 인터뷰 장소를 떠났다. 1991년엔 NBC의 <투데이쇼> 출연을 갑자기 펑크 낸 적이 있었는데 프로그램 예고에서 존 힝클리 주니어라는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건 단 두 번. 사건 이후 이뤄진 짧은 기자회견과 1982년 <에스콰이어>에 직접 썼던 칼럼이 전부였다.
한편 힝클리는 “그날 내가 한 행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주장했고, 재판 결과 정신이상자로 판명되어 교도소 대신 병원에 갇히게 되었다. 너무 관대한 판결이라는 여론이 들끓기도 했지만 의사는 힝클리에 대해 자아도취와 정신 분열로 인한 인격 장애이며 수동성과 공격성이 수시로 바뀌는 경계성 정신 장애를 겪고 있다고 진단을 내렸다. 이후 1999년까지 병원 생활을 하던 힝클리에게 며칠 동안 부모와 함께 지낼 수 있는 배려가 베풀어지기도 했지만, 그가 병원에서 조디 포스터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다시 병원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상태에 따라 몇 번에 걸쳐 외출이 허락되기도 했다. 조디 포스터는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지만 <피고인>(1988)과 <양들의 침묵>(1991)으로 두 번의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되찾게 되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