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 민정팀은 전국 지자체와 공공기관을 상대로 2010년부터 2012년 사이에 실시한 입찰 관련 자료를 요구했다. 이는 이명박(MB) 정부 하에서 이뤄진 입찰을 신뢰할 수 없다는 여권 핵심부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 대선 캠프 출신의 한 관료는 “자칫 MB 정권을 겨냥한 정치보복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진행했다”며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비리는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게 박 대통령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7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지방자치단체 첫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강원도청을 방문, 인사말에 앞서 참석자들과 가볍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는 확보한 자료들을 여러 등급으로 분류해 이 중 일부는 이미 관련 기관에 확인을 지시한 상태다. 검찰과 감사원, 국세청 등이 청와대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 비리 혐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는 “신뢰성이 높은 자료들은 우리가 기초적인 사실 여부만 체크한 뒤 바로 내려 보냈다”며 “우선적으로 처리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현재 국세청과 검찰이 실시 중인 일부 기업들의 입찰비리 내사는 청와대에서 건네진 자료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감사원은 지방자치단체가 발주했던 몇몇 입찰 건에 대해 조사를 마치고 고발 여부 등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일부 자료들은 현재 청와대가 관심을 갖고 직접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엔 한 유통업체와 지방자치단체가 지난해 맺은 입찰 계약이 포함돼 있다. 청와대는 이 업체의 전직 고위 관계자로부터 입찰 과정에서 금품 로비가 이뤄진 물증을 확보했다고 한다. 한 건설사는 MB 정부 초반 수천억 원대의 공사를 부정하게 따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청와대는 이 건설사가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사업을 발주한 지자체를 상대로 광범위한 로비를 펼쳐 경쟁사들을 제쳤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건설사는 경북 지역의 대형 사업을 수주하는 과정에서도 비리가 포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청와대 움직임에 대해 여권 인사들은 확대 해석 자제를 당부한다. 역대 어느 정부든 대통령 임기 초반 공직사회 기강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행해졌던 것이란 말도 덧붙인다. 한 친박 핵심 의원실 보좌관은 “추석 연휴가 끝나면 바로 국정감사와 재·보궐 선거가 치러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연말이고, 해가 바뀌면 지방선거가 열린다”면서 “이 기간 공무원들이 해이해질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임기 2년차인 내년부터 본격적인 국정 운영을 펼쳐야 하는데 자칫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 이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야권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모습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청와대가 꽃놀이패를 쥔 것”이라고도 단언했다. 청와대가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정치적인 상황이 변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이었다. 특히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이 민주당 의원은 “16개 광역 단체장 중 8명이 민주당”이라며 “청와대가 공정하게 한다면 모르겠지만 표적 수사를 할 경우 민주당 소속 단체장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방선거 대비용’이란 주장에 대해 여권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야권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여권 출신의 현역 물갈이를 위한 노림수로도 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2010년 지방선거는 당시 주류이던 친이계가 주도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나 친박으로서는 현 자치단체장들에게 다시 공천을 줄 이유가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벌써부터 친박계 인사들이 특정 지역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프리미엄을 안고 있는 현역들을 교체할 경우 박 대통령 역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할 수밖에 없지만 비리가 드러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입찰 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대해 공공기관과 몇몇 민영화된 공기업 인사와 연관 짓기도 한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후 대부분의 공공기관장들로부터 자진 사표를 받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MB 인맥’으로 분류됐던 인사들이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공공기관장들도 있었다. 지난 9월 6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장석효 한국도로공사 사장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S라인(서울시청 출신)’이기도 한 장 사장의 구속 후 서초동 주변에서는 “현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내지 않아 당했다”는 말이 파다했다.
현재 장 사장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와 대척점에 서 있는 수장들은 여럿 더 있다. ‘민영화 공기업’ KT와 포스코 회장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청와대가 이들을 압박하고 있는 정황들도 속속 포착되고 있다. 여권 핵심부는 ‘그동안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입장이다. 인사가 더 늦어질 경우 박 대통령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장’ 김기춘 비서실장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보관 중인 입찰 비리 파일이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청와대의 이러한 스탠스에 재계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입찰 비리가 드러날 경우 불똥이 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입찰에서 부적절한 로비가 벌어졌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 의도가 정치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청와대 관점에서 보자면 입찰 비리는 정치권과 재계를 동시에 몰아붙일 수 있는 카드다.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셈이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