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과 4강전 상대 우광야 6단.
8강에 4명에 올라간 것을 두고 함박웃음을 웃었으니 격세지감이라는 게 남의 얘기가 아니다. 인터넷 사이트는 ‘한국발 태풍, 중국 강타’라는 제목을 달았다. 우승한 것도 아닌데, 얼마나 반가웠으면! 오죽 다급했으면! 이게 얼마 만인가? 자꾸 되뇌이기는 싫지만, 돌이켜보면 그렇다. 올해 1월 제1회 바이링배에서 저우루이양 9단이 우승한 것을 시발로 2월에는 제17회 LG배에서 스웨 9단, 3월 제7회 잉창치배에서는 소년티가 채 가시지 않은 판팅위 3단이 중국의 세계대회 우승 행진을 이어갔다(이걸로 판팅위는 일약 9단이 되었다).
6월에는 제9회 춘란배 우승컵을 천야오예가 가져갔고, 한국이 허덕이는 사이에 일본이 돌연 분발해 이야마 유타 9단이 제23회 TV아시아바둑선수권을 제패, 10여 년 가뭄에 목이 타고 땅이 갈라지던 일본 바둑계에 한 줄기 단비를, 감격스럽게 뿌려주었다. 한·중은 둘 사이의 전쟁에 일본이 끼어든 것에 대해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5개의 세계대회에서 하나도 건지지를 못했다. 뿐인가. 6월에는 제18회 LG배 16강전, 제1회 멍바이허배 16강전에서, 올라갔던 선수 전원이 탈락하는 참사를 겪었다. 그렇게 거듭되는 비보에 시달리다가 이번에 8강의 절반을 차지했으니 그 체감이 태풍 같았으리라는 것, 이해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게 이틀을 가지 못했던 것. 10일 속개된 8강전에서는 이세돌 9단이 추쥔 9단을 꺾어 혼자 살아남았고, 박정환 김지석 안성준이 각각 스웨 탕웨이싱 우광야 6단에게 고배를 들었다. 우광야는 또 누구냐? 이번에 32강전에서 서봉수 9단에게 필패의 바둑을 역전승하고 올라온 청년이다. 1990년생이니 ‘90후’ 그룹은 아닌데, ‘90후’의 젊은이들이 무섭다고 하나, 전체적으로 기가 살았음인지 ‘90전’이나 ‘80후’의 인물들도 틈만 나면 한칼을 들이대는 것.
안성준은 구리를 보냈으니 제 몫을 한 셈이어서 뭐라고 하기 그렇다. 그러나 박정환과 김지석은 좀 섭섭하다. 왜 국제무대에서는 국내에서만큼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제는 이세돌 9단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찬 시대 아닌가.
1 대 3의 싸움이지만, 이세돌 9단이 한동안 가라앉아 있었다가 요즘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삼성화재배와는 인연이 깊으니 믿어보자고 하지만, 미안한 일이다. 이창호 9단이 쉬고 있고, 원성진 백홍석은 군에 가 있고, 최철한은 중국리그에 신경을 쓰고 있고, 박영훈 조한승 허영호 이영구는 지쳤는지 숨고르기 중인지 주춤하고, 이동훈 나현 변상일 신민준 신진서는 한창 근육을 만들고 있고, 그런 마당이니 박정환과 김지석이 깃발을 들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9단의 4강 상대는 우광야, 거기서 이기면, 스웨-탕웨이싱의 승자와 결승에서 만난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물론 이 9단이 우광야에 앞서고, 결승에 탕웨이싱이 올라오는 경우에는 적어도 7 대 3 정도로는 우세할 것으로 보이나 스웨와 만난다면 그때는 얘기가 좀 달라져서 5 대 5 아니면 5.5 대 4.5가 되리라는 것이 예상평. 그리고 사실은 요즘 분위기로 보아서는 우광야나 탕웨싱도 결코 녹록한 상대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승부는 언제나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것. 준결승은 3번기이며 11월 4, 6, 7일 삼성연수원에서 열린다.
이광구 객원기자
‘흑’ 박정환 9단, ‘백’ 스웨 9단
소개하는 기보는, 우리가 패한 세 판 가운데 제일 아까웠던 박정환과 스웨의 대국. 박정환이 흑이다. 형세가 두세 번 바뀌다가 박정환이 우세한 가운데 종반에 접어든 장면이다.
<2도> 흑1을 기다려 백은 2, 4로 회돌이치고, 8, 10, 12로 시간을 번 후, 14, 16으로 “해보자”고 나섰다. 안 되면 뼈를 묻겠다는 것.
<3도> 생사의 갈림길. 백은 이판사판이므로 흑이 겁나는 장면이다. 절벽위에서의 곡예. 흑1은 안전책? 절체절명의 순간에 손이 떨린 것일까. 백4로 막자 검토실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이건 좀 이상한 느낌”이라는 것.
그래도 흑7로 껴붙이고 9로 늘고, 백10, 12에는 흑13, 또 한 번 껴붙이는 수로, 검토실은 불안해 하면서도, “백이 안 되긴 안 되나?”, 비행기나 버스 안에서도 묘수풀이를 놓지 않는 “사활 귀신 박정환의 수읽기를 믿어보자”고 하고 있었는데… 스웨는 초읽기에 쫓기면서도, 그래서 황망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백14로 끼웠다. 이게 묘착이었다.
<4도> 백8에서 결과는? 패. 박정환이 돌을 거두었다. 계속해서 <5도> 흑A에 따내면 백B로 따내 양패. 따라서 더 둔다면 흑1로 메워가든지 하면서 B의 곳 패를 버텨야 하는데, 흑은 C, D의 곳을 다 메워야 하니 두 수나 늘어진 패인 것.
그렇다면 수가 나는 자리였던 것인가. 검토실도 대국 당시에는 긴가민가했으나 국후 검토에서 <3도> 흑1이 패착으로 규명되었다. 거기를 받지 말고 곧장 <6도> 흑1로 뛰어들어갔으면 백이 사는 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백2는 흑3으로 간단히 안 되니, 백은 일단 <7도> 1로 찔러야 하는데, 여기서 흑은 넘는 것이 아니라 3쪽으로 다시 한 칸을 뛴다는 것. 흑7 다음 백A든 B든 흑C면 끝이고, 실전처럼 <8도> 백1로 끼우면 그때는 흑2로 넘어 역시 그만이라는 것.
8일의 함박웃음이 10일에는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우울한 일이다. 그래도 아무튼 이제는, 박정환의 묘수풀이 대신 이세돌의 폭풍 검법을 믿어보는 수밖에. 미안하긴 하지만.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