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밴쿠버 스타들만 바라봤다
한국은 소치 올림픽에서 몇몇 세계적인 선수들에게만 의존하다 낭패를 봤다.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이 그랬다. 4년 전 모태범(남자 500m)과 이승훈(남자 1만m), 이상화(여자 500m)가 나란히 정상에 올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스피드스케이팅은 이번에도 ‘밴쿠버 3총사’를 중심으로 신화 재현에 나섰다. 이상화는 지난해 여자 500m 세계기록을 4차례나 갈아치우며 이 종목 지존으로 올라섰고, 모태범도 올 시즌 월드컵에서 쾌조의 컨디션을 드러내는 등 남자 500m와 1000m에서 모두 금메달 후보로 지목됐다. 이승훈도 네덜란드가 워낙 강해졌지만 남자 5000m와 1만m에서 색깔에 관계없이 메달을 거머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이상화의 금메달 하나뿐이었다. 모태범과 이승훈은 자신들이 출전한 개인전 두 종목에서 약속이나 한 듯 4위와 12위를 한 차례씩 차지하고 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1월 15일 소치동계올림픽 빙상국가대표선수단 미디어데이에서 이상화와 모태범이 연습하는 모습.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은 몇몇 세계적인 선수들에게만 의존하다 낭패를 봤다. 박은숙 기자
제갈성렬 전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감독은 “3총사는 밴쿠버 올림픽 때 금메달 후보로 전혀 거론되지 않다가 깜짝 우승을 약속이나 한 듯 일궈냈다. 거꾸로 생각하면 소치 올림픽에서 이들을 위협할 다크호스가 분명히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빙상계 전체적으로 4년간 이에 대한 대처가 부족했다”고 전했다.
# 경쟁과 대우가 실력을 키운다
네덜란드는 한국이 본받아야 할 좋은 예다. 네덜란드는 20일까지 소치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걸린 금메달 10개 중 6개를 차지하고, 은메달과 동메달도 각각 7개와 8개씩 거둬들이는 등 ‘오렌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 원동력엔 밴쿠버 올림픽 이후 생겨난 프로 팀과 그에 따른 경쟁 체제가 있었다.
네덜란드빙상경기연맹 언론담당관 욘 판 플리트는 대회 기간 중 “우리가 너무 잘해서 큰일 났다”며 웃은 뒤 “2년 전부터 프로 팀이 지역 연고 개념으로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경쟁 체제가 구축됐다. 선수들의 실력이 늘어난 것은 당연했다”고 말했다. 남자 500m에서 우승한 미셸 물더, 남자 1000m 정상에 오른 스테판 흐루타위스, 남자 1만m 금메달리스트 요리트 베르크스마 등 예상 외의 금메달을 손에 넣은 선수들은 네덜란드 스피드스케이팅의 폭 넓은 저변과 프로 팀 창단, 그리고 정상급 선수에 걸맞은 대우 등이 한꺼번에 이뤄지면서 태어난 경우였다.
왼쪽부터 박소연, 김해진. 사진제공=SBS
하지만 소치 올림픽에서의 부진은 한국 빙상의 소수 정예 방식, 그리고 특정 메달리스트 후보를 위해 다른 대표 선수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에 경종을 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 후보군을 더 늘리고 이들이 상향 평준화되는 방법을 찾아야 평창 올림픽에서 명예회복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 4년 후 쇼트트랙·피겨 어쩌나
쇼트트랙이나 피겨도 마찬가지다. 밴쿠버 올림픽 때까지 역대 올림픽 금메달 19개를 수확했던 효자 종목 쇼트트랙은 이번 대회에서 초반 5개 종목이 열릴 때까지 우승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수모를 당했다.
남자 쇼트트랙의 ‘노메달’ 참패는 더 눈에 띄었다. 러시아로 2011년 귀화한 안현수(빅토르 안)가 500m, 1000m, 5000m 계주 등 금메달 세 개를 목에 걸었고 국민들이 한국 대표팀 대신 안현수를 응원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안현수의 귀화가 스포츠 전반에 깔린 부조리에 따른 것 아니냐”고 발언, 감사원이 빙상연맹에 대한 감사에 나서기로 하는 사태까지 번졌다.
피겨 종목은 김연아가 이번 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해 가장 큰 위기에 몰렸다. 연합뉴스
사실 가장 큰 위기에 몰린 분야는 김연아가 이번 대회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 피겨다. 박소연 김해진 등 여자 싱글에선 ‘포스트 김연아’ 기대주들이 나오고 있으나 얼마나 성장할지 더 지켜봐야 하고, 무엇보다 남자 싱글이나 페어, 아이스댄스 등에서 여전히 세계와 격차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소치 올림픽부터 피겨엔 단체전이 생겼는데 남·녀 싱글과 페어, 아이스댄스 등 4개 세부 종목 출전권을 모두 거머쥔 국가만 단체전에 나갈 자격을 받는다. 한국은 아이스댄스 등에서 외국인 귀화를 추진하는 등 빙상연맹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으나 페어에선 아직 손도 대지 못하는 등 갈 길이 멀다. 김연아는 어떻게 보면 한국 피겨 현실에서 나오기 힘든 돌연변이다. 평창 올림픽 때 외신으로부터 “한국은 김연아 이후 피겨 선수가 없어 단체전에도 나서지 못한다”는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김현기 스포츠서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