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의원이 본격 대선 출마선언을 하고 지지율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근접하면서 최근 정치권에선 이회창 정몽준 양강 구도로 이번 대선을 점치는 시각이 늘고 있다. 이러한 기류 탓인지 최근 한나라당이 정몽준 의원을 주 정적으로 삼았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반면 정 의원측도 이 후보측의 강공조짐에 대해 맞불을 놓고 있다는 것이 정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지지율 30%대를 유지하는 두 대통령 후보의 피말리는 싸움이 본격화됐다는 것이다. 대선까지 불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상황에서 이제 두 ‘용’들은 서로를 향해 거센 불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먼저 불을 내뿜은 것은 이회창 후보측. 정가에선 한나라당의 ‘4억달러 대북지원설’ 제기를 정몽준 의원에 대한 본격 공격의 시발탄으로 보고 있다. 정부와 현대그룹이 대북사업이란 미명 아래 ‘북한에 돈을 퍼주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현대그룹 꼬리표를 뗄 수 없는 정 의원을 옥죄려 한다는 것이다.한나라당이 정몽준 후보에 대한 ‘X-파일’수집에 나섰다는 관측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정가에선 한때 정몽준 의원의 보좌관이었던 한 인사가 얼마 전부터 한나라당에 출근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모 일간지 정치부장을 지내기도 한 이 인사 영입에 대해 한나라당 관계자는 “대선을 앞두고 홍보위원회 활동을 위해 전문가를 영입한 것”이라 밝힌다. 하지만 한 정치권 인사는 “최근 한나라당으로 옮긴 그 인사는 얼마 전까지 정 의원 캠프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며 “대선을 앞두고 상대 후보측 인사를 영입하는 것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최근 한나라당에서 나오고 있는 논평 내용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한나라당은 얼마 전 논평에서 지난 89년 현대중공업 파업 진압을 ‘식칼 진압’이라 명명했다. 공권력이 투입돼 진압된 당시 파업이 무차별 강경진압이었음을 각인시키려는 수식어인 셈이다. 한나라당 최근 논평엔 한 시사주간지의 의혹제기 보도가 다음과 같이 인용돼 있다. ‘정 의원은 테러사건 직전 울산에 내려가 비상중역회의에 참석하고 경남도경에 직접 전화를 걸어 경찰병력 파견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단 한 번의 조사도 받지 않고 유유히 울산을 떠나….’이와 관련, 한나라당측은 “당시 국회 진상조사단이 ‘현대그룹이 그룹차원에서 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사실도 밝혀졌으며 사건 관련자들도 하나같이 ‘당시 노무관리는 현대중공업 실세라인이 주도했다’며 정몽준 의원의 개입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정 의원은 영남에서 신당을 띄우며 전면전을 선포하고 나 섰다. | ||
한나라당은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 노조 탄압을 지시한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 존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당시 노조에게 테러를 가한 행동대 주범 격인 인사들이 지난 92년 국민당의 고 정주영 회장 대선출마 당시 기자회견을 갖고 현대중공업 관계자의 육성 녹음 테이프를 공개한 일이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하지만 92년 대선 때에는 정주영 후보가 현대중공업 노조 테러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어 언론들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해 가볍게 넘어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엔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 의원이 직접 출마를 한 이상 당시 상황을 설명할 테이프 논란이 다시 불거질 것이란 주장이다.
이에 대해 정 의원측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신(이회창 후보)이 김대업씨 테이프로 공격을 당하더니만 이젠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데 테이프 논란을 사용한다”는 비아냥마저 흘러나온다.정 의원측은 한나라당의 공세를 인신공격 및 허위사실 유포로 규정하고 법적 대응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 의원측 한 관계자는 “국회의원 본인이 직접 도경에 전화를 걸어 진압을 지시한다는 게 상식밖의 발상 아닌가”라며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 흔히 나오는 허위사실 유포일 뿐”이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직접 지시 사실이나 증거물이 될 만한 녹음테이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현대중공업 파업 관련 재판 과정에 다 드러났을 것”이라 덧붙였다. 정 의원 본인도 공개석상에서 “한나라당은 초당적 경제기구 설치 등을 논하기 전에 불필요한 말을 줄이는 게 한 방법”이라 밝힐 정도다.
정몽준 의원은 공개석상에서도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현대중공업 파업 진압 개입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정 의원 본인 스스로 “이회창 후보는 남자답지 못하다”고 밝힌 것이다. 의혹을 계속해서 제기하는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를 평하는 데 있어 정 의원은 ‘이회창 후보’대신 ‘이회창씨’란 호칭도 자주 쓰고 있다고 한다. 5년 전 불거진 병풍논란을 다시 꺼낸 일부 정파에 대해선 극한 불쾌감을 보이는 이회창 후보가 정작 10년도 더 지난 현대중공업 파업사건을 거론하는 모습이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정 의원의 ‘분노’는 지난 12일 한 방송사의 초청토론회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정 의원은 “국고로부터 9백억원을 지원받는 거대야당이 제대로 된 정책수행은 안하고 근거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데 주력한다”고 밝혔다. 정 의원은 이 토론회에서 “나는 이념적 성향으로 볼 때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중간지점에 있는 사람”이라며 “내가 민주당 기반 신당의 단일후보가 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의 후보도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의원은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 관련 로비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국제적 공인을 받은 상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며 한나라당측에 ‘금도가 있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정치권에선 정 의원이 박근혜 미래연합 대표와 연대를 도모하려는 것도 결국 한나라당에 대한 총구 겨누기란 분석을 내리고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박 대표는 한나라당의 체제를 ‘이회창 후보의 1인 보스체제’라 비판하고 탈당한 사람”이라고 밝힌다. 이 인사는 “박 대표가 이회창 후보의 정당성을 부인한 영남권 거물급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정 의원측과 연대할 경우 몰고 올 파장이 클 것”이라 설명한다.
이회창 후보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영남권 민심잡기에 정 의원은 최근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얼마 전 대구지역 서문시장을 방문했다가 박수세례를 받은 에 대해 정 의원측은 다소 고무된 분위기다. TK지역 의원측의 한 인사는 “서문시장 지역 상인들은 자신들이 반대하는 정치인이 찾을 경우 비난성 야유를 보내기 일쑤였다”고 밝혔다. 98년 이회창 후보의 방문 이후 시장 상인들이 이렇게 특정 정치인을 환대한 것은 처음이며 그만큼 정 의원이 영남지역에서 선전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대선 최대의 화두로 꼽힐 PK지역 방문에서 정 의원은 신당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했다. 지난 13일 부산 범어사를 찾은 정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통합21’이라는 신당명을 최초로 공개한 것이다. PK지역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어차피 이회창 후보도 영남출신이 아니고 영남의 지지가 ‘친이회창’이라기보다는 현 여권에 대한 반감에 기인한 것”이라며 “정 의원이 영남을 무주공산이라 간주하고 이회창 후보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영남지역을 자신의 정치적 고향으로 간주하고 그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부산지역에서 새로운 당의 태동을 선포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