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0월 12일, 디트로이트 WKNR-FM 라디오 방송에서 시작된 ‘매카트니 사망설’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진다. 사실 조짐은 방송 전부터 있었다. 이상하게도 1969년에 미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매카트니가 죽었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던 것. 수면에 드러난 건 9월 17일 아이오와의 드레이크대학 학보. 캠퍼스에 돌던 루머를 집대성해 정리한 내용이었고 약 한 달 후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 방송의 여파가 상당하자 DJ인 러스 깁은 더 많은 단서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수많은 제보들이 있었고, 비틀스의 노래와 앨범 이미지는 매카트니 사망의 증거들이 되었다. “폴은 죽었어”(Paul is a dead man)라고 말하는 ‘I’m So Tired’ 외에도, ‘Revolution #9’에선 “나를 죽은 사람으로 대신하여”(turn me on dead man)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1969년 10월 21일엔 뉴욕의 WABC 라디오에서 로비 용게라는 DJ가 아예 특집으로 한 시간 동안 다루었는데 수많은 단서가 제시되었다. 존 레넌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에선 “나는 폴을 땅에 묻었네”(I buried Paul)라는 소리가 들렸다.
음모론자들은 비틀스의 노래와 앨범 재킷에서 폴 매카트니 사망 증거들을 찾았다. <서전트 페퍼스…> 앨범 사진 속 폴의 완장에 공식 사망 선고 약자 ‘OPD’가 새겨져 있다거나 <애비 로드> 앨범 사진엔 맨발의 매카트니만 다른 세 멤버들과 스텝이 달라 죽음의 증거라는 주장이다.
<애비 로드> 앨범 재킷은 마치 명백한 증거처럼 여겨졌다. 비틀스의 네 멤버가 길을 건너는 이미지인데, 흰 옷을 입은 존 레넌은 장례식을 집전하는 성직자이며 검은 옷을 입은 링고 스타는 장의사,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조지 해리슨은 무덤 파는 사람 그리고 맨발의 매카트니는 죽은 자라는 것이다. 게다가 매카트니만 다른 세 멤버들과 스텝이 다르다.
<서전트 페퍼스 론니 하트 클럽 밴드> 앨범 재킷 사진에선 폴 매카트니가 완장을 차고 있는데, 거기엔 ‘OPD’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으며, 이것은 ‘공식 사망 선고’(Officially Pronounced Dead)의 약자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정설처럼 굳어지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마치 여기저기서 구전되던 이야기가 하나의 설화처럼 만들어지는 과정과도 같았다. 먼저 죽은 날짜가 밝혀졌다. 1966년 11월 8일 화요일이라는 것이며, ‘I Am the Walrus’의 가사인 “어리석었던 핏빛 화요일”(stupid bloody Tuesday)은 그 증거였다(게다가 ‘왈러스’(Walrus)는 그리스어로 ‘시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설(?)에 의라면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매카트니와 다른 멤버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화가 난 매카트니는 자신의 애스턴 마틴에 올라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자제력을 잃은 상태에서 속도를 조절하지 못했고, 목이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큰 사고로 죽었다는 것. ‘A Day in the Life’라는 노래에 나오는 “그의 정신을 자동차 밖으로 날려 버린”(blew his mind out in a car)라는 구절이 그 증거라면 증거다.
매카트니와 닮은 꼴 윌리엄 캠벨
공식적으로 매카트니가 죽었다고 판정된 건 그 다음 날인 11월 9일 오전 9시. 비밀리에 검시되었다. 그렇다면 매카트니의 죽음 이후 비틀스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윌리엄 캠벨이라는 사람을 ‘가짜 매카트니’로 영입했다. 그는 과거에 ‘매카트니 닮은꼴 경연대회’에서 수상했던 사람으로, 이후 비틀스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매카트니의 죽음을 믿는 사람들이 구성한 시나리오이며,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이야기다. 당시 그 신뢰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음반 판매고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비틀스의 새 앨범은 물론, 매카트니 사망설의 근거가 되는 예전 앨범들까지 판매고가 오르기 시작했다. <서전트 페퍼스 론니 하트 클럽 밴드>와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는 1967년에 발매된 앨범이었는데, 1969년에 다시 앨범 차트에 오를 정도였고, 매카트니가 죽었다는 소문은 혹시 음반사의 장삿속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면 당시는 비틀스에게 어떤 시기였을까? <애비 로드> 앨범을 내놓은 그들은 서서히 해체 과정을 밟고 있었고, 매카트니는 아내 린다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집에 칩거하며 솔로 활동을 준비 중이었다. 비틀스의 홍보 담당자인 데릭 테일러가 “매카트니가 죽었다는 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성명서를 내긴 했지만, 당시 비틀스 멤버들이 그 어떤 반응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던 건, 이미 팀워크가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닫자 결국 당사자가 나서야 했고, 폴 매카트니는 1969년 11월 7일 <라이브> 매거진과 인터뷰를 한다.
“아마도 이런 루머가 떠돈 건, 최근 내가 언론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난 이전까지 너무나 충분히 언론에 공개되었고, 이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나는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며, 가끔씩 작업을 하고 있다. 나는 10년 동안 계속 달려왔다. 단 한 순간도 쉰 적이 없었다. 이젠 조금 쉬려 한다. 조금 덜 유명해지더라도 말이다.”
이 인터뷰 이후, 루머는 생겨난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잦아들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