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천에서 탈락한 인사들이 ‘복수혈전’을 벼르고 있어 중앙당과 공천자들이 당황하고 있다. 사진 왼쪽 위부터 박종웅 권태망 김일윤 박승국 박시균 한나라당 의원. | ||
대구에서 공천을 받은 한나라당 모 후보는 이 같은 일부 ‘탈락 의원’들의 행태에 대해 “공천이 결정되자 당기와 간판을 불 태우고 집기를 압류하는 등 해당행위가 정도를 넘어섰다”면서 “당직자들을 배신자로 내몰아 당 운영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공천을 반납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고 말할 정도다.
현재 공천 탈락 후 무소속 출마 의사를 밝힌 현역 의원은 6명, 그 중 5명이 한나라당 의원이다. 그러나 공천을 받지 못해 ‘칼’을 가는 전 의원과 원외 위원장 등을 더하면 그 수는 20여 명에 이른다.
한나라당은 현역의원을 포함해 10여 명의 후보자들이 공천 탈락에 불복, 무소속 출마를 결정한 상태고 그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도 1명의 현역의원을 포함, 4~5명의 공천 신청자들이 무소속 출마를 준비하고 있으며 열린우리당도 의원급 후보 6~7명이 무소속 출마를 고려중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공천을 받은 후보들은 물론 각 당 중앙당도 무척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한나라당 부산 연제 공천자인 김희정 부대변인은 “공천을 신청할 당시 후보들은 지구당 위원장 사퇴서와 공천 승복 서약서를 제출했었다. 그러나 실제 지구당에는 위원장직 사퇴서를 제출하지 않은 채 위원장으로서의 권한을 마음대로 누리며 불법적인 선거운동을 자행하는 이들이 있다”며 “공천을 받은 후보들은 반대로 명함 한 장 마음대로 돌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비난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라며 답답한 속내를 털어놨다.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현역 의원들은 대부분 공천·경선 과정이 불공정했다는 것을 탈당·무소속 출마 결정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중앙당에서 영입인사를 배려하기 위해 ‘페어게임’을 포기했다는 문제 제기부터 현역의원에 대한 ‘역차별’이 공정한 경선을 방해한다는 것 등이 이유다.
몇몇 인사들은 당지도부가 현역의원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정치탄압을 하고 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한나라당 김일윤 의원(경북 경주)처럼 “지역의 모든 현안 사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부득이’ 출마를 결정했다”고 밝히는 경우도 있었다.
경북 영주가 지역구인 한나라당 박시균 의원은 “최병렬 대표가 당을 사당화하기 위해 지역의사를 무시하고 나를 탈락시켰다”며 “대구·경북지역 무소속 연대를 결성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부산 사하 을)도 “도덕성이나 의정활동에서 아무런 하자가 없는 본인을 탈락시킨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 털어내기’이자 ‘박종웅 죽이기’”라며 자신을 당 지도부의 ‘보복공천의 희생양’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박 의원의 지역구에서 공천을 받은 한나라당 최거훈 후보는 “선거를 준비하기가 힘들다. 박 의원이 나를 철새정치인이라고 비판하는 등 선거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지만 똑같이 비판하는 것이 선거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당 공천을 받은 이상 선거는 선거대로 치러야 하지 않겠나. 공천에 불복하는 정치문화가 빨리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
민주당 박주선 의원의 경우 “검찰의 표적수사에 이어 선거구마저 통폐합된 상태지만 지역 선거구민에게 당당히 심판받겠다”며 “당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무소속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 내에서는 이를 ‘말릴 수도 놔둘 수도 없다’는 애매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 박주선 의원도 유권자에게 심판받겠다며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 ||
김희정 부대변인에게 공천 경합에서 밀린 한나라당 권태망 의원(부산 연제)측 관계자는 “경선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획공천 밀실공천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며 “반드시 당선되어 정당하게 평가받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에 대해 김 후보는 “말도 안되는 얘기다. 3~4번의 공천심사 과정을 거쳐 후보를 결정했는데 기획공천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며 “여론조사 등 공개적인 공천과정을 통해 후보가 결정됐다면 깨끗이 승복하고 따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박승국 의원(대구 북구갑) 지역구에 공천을 받은 이명규 후보도 “여론조사에서 2배 이상의 우세가 나왔다. 공천은 정당했다고 본다”며 “그렇지만 마음 놓고 비난하기도 어렵지 않은가”라며 당혹스러운 심경을 내비쳤다.
공천과정에 대해서도 이 후보는 “나는 중앙당에 인맥 하나 없는 사람인데 공천을 받은 것을 확인한 후 나 자신도 놀랐다. 당 공천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공천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라며 “객관적 여론조사 결과 외에 내가 유리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변해야 살 수 있다는 당 내외의 위기감이 확산된 결과라고 본다”고 말했다.
원외 위원장을 포함한 공천 신청자로 범위를 넓히면 공천·경선 불복자수는 수십 명에 달한다. 지난 3일 한나라당 원주지구당 함종한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중앙당이 낙하산 인사를 하기 위해 20여년간 지역구를 위해 헌신해 온 나에게 경선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공천을 확정했다”고 당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무소속 출마 의사를 밝혔다. 함 위원장의 지역구에는 방송인 이계진씨가 공천을 받았다.
한나라당 충남 예산지구당 최승우 위원장도 경선에 불복, 지난 9일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고 민주당 광주 광산지구당의 경우 경선에 나섰던 두 명의 후보가 돌연 경선 불참을 선언, 연대해 공천자인 전갑길 후보에 도전장을 냈다.
열린우리당 법률지원단장을 맡고 있는 유선호 전 의원의 경우는 핵심 당직자가 지도부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한 첫 사례로 눈길을 끌었다. 원래 경기 군포 출마를 원했던 유 단장은 당이 군포 대신 인근 안산 단원 을에 공천을 하자 이에 반발, 지난 8일 탈당을 선언하면서 무소속 출마 의사를 밝혔었다.
당시 유 단장은 “당 지도부가 경선을 배제한 채 부당한 개입을 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떳떳하게 다시 당에 돌아오겠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유 단장의 무소속 출마는 ‘불발’로 그쳤다. 탄핵안이 결의된 12일 당 복귀를 선언, 애초 공천을 받았던 지역구인 안산 단원 을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 유 단장의 입장 변화에 대해 군포 지역구 공천자인 김부겸 의원측은 “다행이다”며 “같은 당에서 일했던 분이신데 총선에서 맞붙었다면 타당 후보들보다도 더 껄끄러운 승부가 됐을 것”이라고 안도했다.
자민련도 상황은 마찬가지. 천안 갑 공천에서 탈락한 정일영 전 의원이 여론조사를 무시한 공천이라며 탈당, 무소속 출마를 밝히고 있어 중앙당과 공천자인 도병수 후보측이 속을 태우고 있다.
자기 당 후보에게 칼을 겨눈 채 ‘복수혈전’에 나선 공천 탈락 후보들이 총선에서 과연 어떤 ‘결투’를 벌일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