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핵안 가결 후 관저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총선 이후를 구상할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사진제공=청와대 | ||
노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지난 12일 오후 5시15분 이후 청와대 비서실은 입을 닫았다. 당초 언론과의 관계 개선을 취임 일성으로 내뱉았던 김우식 비서실장은 전 직원 조회에서 공개적으로 ‘함구령’을 내렸고 기자들과의 접촉을 금지했다. 윤태영 대변인도 기자들과의 만남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기자들 질문에는 “이병완 홍보수석에게 물어보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대언론 접촉 창구를 홍보수석으로 일원화했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한 비서관이 기자들의 유도성 질문에 넘어가 노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판 대리인에 문재인 전 민정수석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흘리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청와대 내 새로운 ‘왕수석’으로 떠오른 이병완 수석이 수석 보좌관 회의석상에서 공개적으로 해당 비서관의 직속 상관인 모 수석비서관에게 ‘분노’에 가까운 항의를 했고 사과까지 받아냈다는 게 청와대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그만큼 청와대 비서실이 몸조심,입조심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처럼 외부에 비치는 것과는 달리 노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위상이나 기능은 여전히 과거와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노 대통령의 한 핵심 참모는 “노 대통령이 관저에서 부인과 단둘이 심심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면서 “그동안 아침 저녁으로 국무위원이나 외부 인사들을 초청해 식사를 함께하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해왔듯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기류는 대통령 자문기구인 정책기획위원회에서 노 대통령 ‘학습’ 스케줄과 자문 교수 명단을 짜고 있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기획위원회는 당초 김병준 정부혁신위원장 등 기존 자문 교수 출신 인사들을 대거 명단에 포함시키려 했으나 김 위원장 등이 “평소 만나기 힘든 외부 인사들 위주로 명단을 짜는 게 좋겠다”고 해 다소 변경됐다고 한다.
탄핵안 가결 다음날인 지난 13일 열린우리당 김원기 고문과 함께 오찬을 한 것도 노 대통령의 행보에 큰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다.
관저 내부에서의 생활에 큰 변화가 없듯이 국정 운영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평소에도 주요 현안들에 대해 이미 해당 부처 장관들이 자율적으로 처리하고 국무회의, 수석보좌관 회의 등에서 ‘시스템’에 의해 결정이 이뤄지도록 해놓은 상태이기 때문. 지난 2월 새로 임명된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은 최근 차관회의에서 이 같은 시스템이 생각보다 정교하게 갖춰져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인사 문제도 대표적인 케이스다.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은 최근 국가보훈처 차장과 외교안보연구원장, 법제처 차장 등 차관급 인사를 했다. 그러나 고 대행이 실질적인 인사권을 행사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사 발표 자체도 17일 오전 청와대 정찬용 인사수석을 통해 이뤄졌고 정 수석은 전날 오전 민정수석실 등과 협의를 거쳐 사실상 결론을 내린 뒤 총리실을 방문해 고 대행에게 논의 결과를 보고하고 ‘결재’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뜻이 어떤 식으로 반영됐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인사 자체가 청와대 내 인사시스템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의 의중이 담긴 인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회 갈등 현안에 대한 대응에서도 ‘노심’(盧心)의 흔적이 묻어난다. 탄핵안 가결 이후 친노(親盧) 진영을 중심으로 탄핵 반대 촛불 시위가 일어나자 대표적인 ‘코드’ 장관으로 불리는 허성관 행자부 장관은 문화행사를 전제로 시위를 허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연히 노 대통령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청와대 안팎에선 허 장관이 노 대통령의 의중을 잘못 읽은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고 결국 최기문 경찰청장이 나서서 야간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허 장관이나 최 청장이 다른 입장이 아니다”고 설명했지만 노 대통령의 한 최측근 인사는“지금 상황에선 촛불 시위 과정에서 행여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 엄청난 악재가 될 수 있는 만큼 야간 집회를 아예 못하도록 하는 게 노대통령의 생각에 가깝지 않겠나”라면서 “허 장관이 노 대통령의 뜻을 잘못 읽은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코드’ 장관으로 불리는 강금실 법무장관이 탄핵안에 대해 17대 국회에서 스스로 철회하는 게 좋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도 단순히 강 장관 개인의 생각으로 보는 시각은 적은 듯하다. ‘안부인사 차원의 만남’이라는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강 장관은 노 대통령 탄핵 심판 대리인단 간사를 맡은 문재인 전 민정수석과 만나 헌법재판소의 공개 변론 준비에 대한 논의를 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더욱이 청와대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사면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사면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 정부로 넘어오자 곧바로 민정수석실 내부 검토를 거쳐 “문제가 많다”며 고 대행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했다고 한다.
박정규 민정수석은 “단지 문제점만 지적하고 결정은 윗사람(고 대행)이 알아서 하라고 하는 식의 보고는 없다”면서 “우리의 의견도 전달했다”고 밝혀 청와대의 반대 입장을 전달했음을 내비쳤다. 다만 이 경우는 노 대통령의 뜻을 반영했다기보다는 청와대 참모들이 먼저 나서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제한하는 데 대해 강력 반발하고 나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밖에 노 대통령에게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이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의 ‘정보 보고’와 홍보수석실 등의 언론보도 관련 보고도 계속되고 있다. 고 대행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노 대통령에게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친 거의 모든 고급 정보가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우식 비서실장을 통해서도 주요 국정 현안에 대한 보고를 수시로 받고 있으며 국무위원들도 관저에서의 식사 등 형식으로 보고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노 대통령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청와대 관저에 머물고 있지만 사실상 국정 전반에 걸쳐 막후에서 기존의 ‘관리자’ 역할은 여전히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으로선 이번 기회에 자신이 지난 1년여 동안 공들여 만든 각 부처별 자율적 운영 시스템도 점검해보고 재충전도 하면서 총선 이후 정국을 구상해볼 절호의 기회가 되는 셈이다.
야당이 뒤늦게 탄핵안 가결 자체가 ‘정치 10단’으로 불리는 노 대통령의 고도의 전략에 말린 것이라는 ‘사전 기획설’을 주장한 데 대해 청와대는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음모설’의 실체가 있는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탄핵안 가결 이후 총선에서의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굳어지고 있는 가운데 총선 이후 노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가 한층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검찰이 박지원 전 문광부 장관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박 전 장관이 주요 언론사 간부들에게 정기적으로 고액의 촌지를 제공한 것과 관련해 일부 언론사 간부를 소환 조사하기 시작한 것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일각에선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통한 정치판 물갈이에 이어 촌지수사를 통해 언론 물갈이에 나선 것 아니냐”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의 정책 브레인 중 최고로 꼽히는 김병준 정부혁신 및 지방분권위원장은 최근 사석에서 “총선 이후엔 지난 1년간 구축했던 국정운영 시스템을 기반으로 노 대통령의 개혁 강도와 속도가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마디로 지금 청와대는 침묵 속에 또 한차례 엄청난 태풍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조은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