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8년 2월16일 조세형 당시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이 ‘북풍’과 관련하여 문건을 들어보이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
야당에서는 안기부의 공작이라고 반박하고 나왔다. 갑자기 윤흥준이라는 인물의 폭로 기자회견도 있었다. 김대중 후보의 아태재단이 북한의 자금으로 설립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대통령이 됐다. 그 후 검찰의 특별수사팀은 선거전에 있었던 일련의 의혹의 배경인물을 하나하나 구속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1998년 3월17일 저녁. 광고회사 사장 박기영씨는 <한겨레>를 보다가 이상한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암호명 흑금성’이라는 비밀공작원이 광고회사의 전무로 위장해서 북한을 오고간 내용이었다. 신문에는 흑금성이 북한을 오고간 일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북한과 광고계약을 맺은 회사는 박 사장 회사 하나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그는 박채서 전무의 출장일지를 꺼내 신문과 비교해 봤다.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자기의 회사가 정부의 대북 공작활동에 이용당한 셈이었다. 그동안 쌓은 모든 것이 굉음을 내면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전 언론이 속칭 ‘이대성 파일’ 사건이라고 하면서 특종으로 파헤친 핵심 내용은 이랬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안기부장을 비롯한 핵심간부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비밀문건 5부를 작성했다. 내용은 그동안 흑금성 공작을 통해 얻은 김대중 정권의 약점들이었다.
안기부 핵심간부들은 그 문건을, 수사를 차단하고 자신들을 보호할 무기로 삼았다. 그 비밀 파일이 정무수석과 대통령의 측근정치인에게 전달됐다. 우연히 그 정치인의 집을 찾아갔던 한 기자에게 그 비밀 문건이 포착됐다. 며칠 후 전 언론을 통해 폭로된 비밀 문건의 내용은 정치적 폭풍을 몰고 왔다. 검찰에 끌려간 안기부장이 칼로 배를 가르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들의 권력투쟁 속에 날벼락을 맞은 건 광고회사 사장 박기영이었다.
그는 재벌계열의 광고회사에서 독특한 CF들을 성공시킨 재주꾼이었다. 아직 냉전체제였던 당시 어느 날 그는 문득 평양거리를 배경으로 한 광고를 구상했다. 배우 안성기가 지프차를 타고 판문점 철책을 열고 북으로 가면서 휴대폰 통화를 하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솟아올랐다. 그는 북한 광고 사업에 운명을 걸었다. 하얼빈에서 사기꾼에게 속기도 하고 월경해서 북한을 촬영하다가 곤욕을 치렀다. 7년의 방황 끝에 그는 빚만 가득 짊어진 채 절망했다.
그 무렵 딸아이와 같은 유치원을 다니는 앞집과는 더러 차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는 사이였다. 소령 출신이라는 앞집 남자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동네일도 솔선해서 잘했다. 박기영씨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고생담을 얘기하기도 했다. 앞집 남자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 역시 북한사업에 대해 약간 경험이 있다고 말을 했다.
그 앞집 남자의 정체는 정보 기관원이었다. 앞집 남자는 이미 회사원으로 위장해 북한으로 침투하겠다는 ‘편승공작’ 계획서를 상부에 올려 승인을 얻은 상태였다. ‘암호명 흑금성’인 앞집 남자는 박기영 사장 아래의 전무로 영입됐다. 전무의 활동으로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북한측과 계약이 체결됐다. 여러 곳에서 투자도 했다. 방송국과 기획사들이 경쟁적으로 박기영 사장에게 계약을 하자며 매달렸다. 평양에서의 광고촬영은 순탄하게 완성됐다. 박기영 사장은 냉면집 옥류관에서 월북한 천도교 교령 오익제도 우연히 봤었다.
▲ 국가정보원(옛 안기부) 건물. | ||
모든 내용이 신문에 정확히 나 있으니까 당연히 이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일심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흑금성 공작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 건 정보기관에는 불문율이 있다. 공작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 대신 공작으로 인해 국민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조용히 배상했다. 그러나 수장이 바뀐 안기부는 그냥 침묵할 뿐이었다.
파산을 한 박기영씨가 내게 항소심의 소송을 의뢰했다. 당시 박기영씨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단칸셋방에서 안면근육 마비까지 오고 있었다. 아내가 피아노 레슨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투자받은 거액의 채무는 평생 그를 짓누르는 멍에였다.
어느 날 박기영씨의 부인이 몰래 나를 찾아와서 1백만원을 주고 갔다. 미안해서 변호사를 찾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마련해 왔다는 것이다. 부인은 북한측과 계약이 성사될 때 남편이 전세 보증금까지 빼서 뒷돈으로 사용했다고 호소했다.
국가정보기관과의 싸움은 골리앗과의 투쟁이었다. 모든 증거를 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국가 기밀성 판단’이라는 명분 때문에 그들의 허락을 얻어야만 주장도 할 수 있었다. 증인도 그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법정에 나올 수 있었다. 한마디로 법적투쟁이 불가능한 상대였다. 다른 변호사들도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소송을 맡아 세무조사라도 당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나 혼자 길을 가기 시작했다. 김정일을 상대로 반환 청구소송까지 생각했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돼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에 올 때 서류가 그에게 송달되게 하면 어떨까 하는 방법이었다.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돈 떼먹은 놈은 ‘국방위원장님’이고, 달라는 사람은 ‘조롱의 대상’이 될 게 틀림없었다.
나는 먼저 정보기관 핵심간부를 조용히 만나 책임자에게 말해달라고 사정했다. 예산도 보상할 명분도 있는데 안해 주는 게 이상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난 정권의 일에 대해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법원도 별다른 새로운 증거가 없는 사건을 기계적으로 다시 기각시키려는 낌새를 보였다. 어느 날 나는 법정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보기관의 흑금성 공작서류에 대한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하겠습니다.”
“에이, 거기서 공작서류를 법원에 제출해 줄 리가 있겠습니까?”
재판장은 쓸데없는 시간낭비만 한다는 힐난 투로 나를 말렸다.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할 수 있는 건 변호사의 권한입니다. 또 상대방에게 서류를 제출하라는 명령은 법원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그걸 내든지 말든지는 국정원측이 알아서 할 사항입니다. 재판장께서는 국정원측의 속까지 아예 헤아려서 변호사에게 대변하시는 겁니까?”
▲ 이효리 조명애의 남북 합작 광고. | ||
나는 사람들을 통해 흑금성을 만나려고 수소문했다. 안전을 위해 그는 자신의 소재나 전화번호를 함부로 남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어렵게 흑금성을 만났다. 괴물 같이 생각했던 사람도 막상 만나면 평범한 이웃의 보통사람이다.
그는 사정이 더 딱했다. 북한의 권력핵심까지 접근해서 귀중한 정보를 보낸 공로자였다. 그런 그의 정체가 어느 날 모든 신문에 어처구니없이 까발려졌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했다. 북측에서 언제 독침이나 총알이 날아올지 몰랐다. 정권이 바뀐 우리 정보기관도 그를 용도 폐기했다. 신문은 오히려 그를 이중간첩으로 몰았다. 그가 오히려 조사대상이 됐다.
그는 공작원마다 최후의 경우 허무한 이용물이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 둔다고 했다. 그는 비밀장소에 보관해둔 세 개의 검은 007가방이 그가 실종될 경우 자동적으로 국내외 언론사에 배달되게 장치해 놓았다고 했다. 결국 그 서류가방이 그를 살렸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는 내용에 대해선 침묵했다. 공작원인 그 역시 불쌍한 피해자였다. 명문 지방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군에서도 우수한 인재였다. 비상한 기억력과 대담성을 갖춘 우수한 공작원이었다. 그는 자신 때문에 파멸한 박기영씨에게 진정으로 미안해했다. 마침내 그가 각오를 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저나 박기영씨에게 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섭섭합니다. 저질의 조폭 사회에서도 이런 졸렬한 배신은 하지 않아요. 국가가 오리발 내밀면 내가 증인을 서죠.”
비밀누설로 처벌될 가능성이 있는 그의 각오였다. 뿌리 깊은 정의감 없이 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증인으로 신청되자 재판장도 정보기관을 대표해서 온 실무자를 판사실로 불러 설득했다. 비밀공작원이 증언하는 경우는 적절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기관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재판장은 나라가 어떤 때는 정말 비열하다는 푸념을 독백처럼 내뱉기도 했다. 마침내 비공개 재판정에 흑금성이 증인으로 섰다. 그는 과감히 모든 걸 털어놓았다. 마지막에 이렇게 한마디했다.
“국가는 비겁했죠. 그래서 내가 나온 겁니다.”
사선을 넘나든 그를 아무도 겁줄 수 없었다. 드디어 고등법원은 국가가 6억5천만원을 주라고 결정을 했다. 대법원도 우리 손을 들어 주었다. 힘든 승리였다.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 남한에서 스타가 됐던 북의 무용수 조명애가 이효리와 함께 광고를 찍은 내용이 흘러나왔다. 조명애의 출연을 성사시킨 숨은 주역이 바로 박기영씨였다. 재기한 그가 기자들의 물음에 하나하나 신중하게 답변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환하고 기쁜 표정이었다.
엄상익 변호사는?
새로 연재하는 ‘사람과 사건들’의 필자 엄상익 변호사(52)는 경기중·고등학교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82년 사시에 합격한 후 공직 생활을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간지와 월간지에 고정칼럼을 써 ‘글 쓰는 변호사’로 널리 알려졌으며, 저서로 <피고인 각하>, <탈주범 신창원>, <대도 조세형>, <하나님, 엄 변호삽니다>, <변호사와 연탄 구루마> 등이 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