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3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후보로 나온 이인제(왼쪽) 한화갑 의원이 단상에 함께 앉아있다. | ||
그래서 한화갑(전남 무안·신안) 민주당 의원과 이인제(충남 논산·계룡·금산) 자민련 의원의 당선은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이번 당선으로 똑같이 4선 의원의 반열에 올랐고, 4·15 총선 참패로 당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민주당과 자민련의 향후 진로를 결정할 대표 주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또한 총선 전에 불거진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검찰의 사법처리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까지 닮은꼴이다. 이들에게는 봄이 왔으되 진정한 봄은 오지 않은 셈이다.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이번 총선에서 금배지를 다시 따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한 의원의 경우, 총선 전 민주당 내 쇄신요구와 ‘호남 물갈이론’에 따라 수도권 지역구 출마를 선언했다가 검찰에 구속될 위기를 맞자 ‘옥중출마’를 염두에 두고 다시 ‘호남행 열차’를 타고 자신의 텃밭으로 내려갔다.
탄핵역풍이 절정에 달했던 3월에도 지역구 여론조사에서 호남지역 민주당 후보로는 유일하게 열린우리당 후보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보였던 한 의원은 결국 57.5%의 득표율을 얻어 열린우리당 김성철 후보(39.6%)를 여유롭게 제치고 당선됐다.
한 의원의 생존은 ‘리틀 DJ’라는 애칭이 말해주듯이 유일하게 DJ를 이어 호남을 대표할 만한 중진 정치인이라는 지역 유권자들의 인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민주당 분당사태를 막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점과 이번에 낙선의 고배를 마신 김옥두 박상천 의원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혁적이라는 평판을 받아온 점도 당선에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선 직후 “이념과 지역, 세대간 갈등을 뛰어넘어 국민의 에너지를 한데 모아 화합의 정치를 펴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특히 그는 “50년 역사의 민주 정통 세력의 본산인 민주당을 합리적 개혁세력의 구심점으로 살려내겠다”며 민주당 회생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자신의 포부를 실천에 옮기기 전에 영어(囹圄)의 몸이 될 공산이 크다. 한 의원의 금품수수 혐의를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가 “한 의원의 구속 수사는 불가피하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대검 중수부(부장 안대희)는 총선 직후 오는 5월30일 제17대 국회 개원 전에 각종 비리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는 정치인들의 사법처리를 마무리짓겠다고 밝힌 바 있어, 한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 재청구는 시간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한 의원은 이미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됐으나 민주당 당원들의 물리적 제지 때문에 집행을 못했을 뿐”이라며 “단지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됐다는 것 말고는 사정에 변화가 없는 만큼 불구속 기소로 방향을 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한 의원은 이미 알려진 대로 검찰의 대우건설 및 하이테크하우징 비자금 수사 과정에서 민주당 대표 경선자금 등 명목으로 SK그룹에서 4억원, 하이테크하우징에서 6억5천만원을 각각 받은 혐의가 드러난 상태다. 법원은 지난 1월 한 의원의 영장을 발부하면서 SK그룹 자금 4억원 수수혐의만 인정했으나, 검찰은 보강수사 결과 등을 근거로 하이테크하우징 자금 6억5천만원 수수혐의도 다시 영장에 포함시킬 방침이다.
최근 비리 정치인에 대한 검찰의 구형량과 법원의 선고 형량이 상당히 높아진 점을 고려하면 한 의원은 새로 구속영장이 발부돼 재판에 넘겨질 경우 상당 기간의 수형 생활을 각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자금 성격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현대측으로부터 5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무소속 박주천 의원만 해도 지난 6일 1심에서 무려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인제 의원 역시 앞길이 그리 순탄하지 않아 보인다. 이 의원은 이번 선거운동 기간 내내 탄핵 후폭풍과 ‘국내 첫 여성 장군’ 출신인 열린우리당 양승숙 후보의 거센 도전에 시달리다 ‘충청권 대표 인물론’을 앞세워 막판 대역전극을 일궈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검찰이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 이회창 후보 지지 부탁과 함께 불법 정치자금 2억5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의원을 조만간 소환조사한 뒤 사법처리한다는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한 의원과 비슷하게 총선 전에 검찰 소환에 불응하다 한차례 체포영장이 발부됐으나, 국회가 체포동의요구서를 처리하지 않아 위기를 모면한 전력이 있다.
검찰은 이번에도 이 의원이 순순히 소환통보에 응하지 않으면 곧바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강제로 신병확보에 나설 계획이다. 또한 검찰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면서 수사에 비협조로 일관한 이 의원에 대해 구속영장 청구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민주당과 자민련의 ‘좌장’ 두 명이 잇따라 구속 수감되는 상황이 빚어질 전망이다.
이 의원은 중간에서 돈 심부름을 한 김윤수 전 공보특보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으나, 한나라당으로부터 5억원을 받아 이중 절반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고 나머지 2억5천만원을 이 의원에게 전달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씨는 최근 법정에서 “이 의원한테 돈을 전달받은 사실을 확인했다”는 기존 진술을 재확인했다.
김씨는 선거 다음날인 지난 16일 열린 공판에서 “이 의원의 자택에 돈을 갖다준 날 이 의원이 손님과 함께 있어서 말씀을 못 드렸다”며 “그 뒤 서울 라마다르네상스 호텔에서 만난 이 의원에게 지나가는 말로 ‘사모님께 말씀 들으셨죠?’라고 완곡하게 물어봤고, 이 의원이 뒷짐을 지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한나라당 이병기 전 특보로부터 돈을 건네 받기 며칠 전 이 전 특보와 이 의원이 단둘이 만난 적이 있다”며 “그때 이미 돈 얘기가 오갔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돈을 전달한 뒤에도) 이 의원이 돈에 대해 말하지 않아 (먼저) 물어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또 자신이 2억5천만원을 빼돌린 것과 관련해 “공보 특보를 하면서 개인비용을 많이 사용해 진 빚을 갚는 데 2억5천만원을 썼다”면서 “기자를 상대로 하는 업무특성상 한 달에 4백만∼1천만원의 활동비가 들었는데, 별도 활동비가 지급되지 않아 개인 비용으로 충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김 전 특보가 5억원을 모두 개인적으로 사용했고, 내게 전달된 돈은 한푼도 없다”며 펄쩍 뛰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검찰이 김 전 특보의 처와 장모까지 연행하고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은행통장과 부동산 문서 등을 몽땅 압수하여 놓고 밤새도록 추궁을 계속한 끝에, 내게 돈을 줬다는 허위 진술을 받아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검찰은 한·이 의원의 혐의 부인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사법처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다만 각기 당 대표급인 두 사람의 위상을 감안할 때 예상 가능한 ‘야당 탄압’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고심하는 눈치다.
실제로 민주당은 총선 직후 한 의원에 대한 검찰의 영장 재청구 방침이 언론에 보도되자 “검찰이 한 전 대표에 대해 재수사 운운 하는 것은 야당 죽이기로 볼 수밖에 없다”며 “당내 경선 자금을 문제 삼으려면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의장, 한나라당 경선 후보 등을 모두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며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적어도 한 의원의 경우, 불법 경선자금을 사용한 혐의로 지난해 검찰에 고발된 노 대통령과 정 의장에 대한 수사와 처리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신병처리를 늦추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공정성 시비가 일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대희 중수부장의 말도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검찰은 이미 노 대통령측의 불법 경선자금 규모가 최소 2억3천만원에 이르는 사실을 밝혀낸 상태다. 이 의원 건도 형평성 시비 차단 등을 위해 한나라당 입당과 함께 ‘이적료’를 받은 정치인 11명의 신병처리 수위를 결정할 때 일괄 처리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17대 국회 개원 전에 정치인 수사를 매듭짓겠다는 방침을 굳힌 만큼, 두 사람의 운명은 아무리 늦어도 다음달 하순 이전에 결정될 전망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