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파머는 병원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전기 충격 치료를 받는 등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작은 사진은 전두엽 수술의 야만성을 폭로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웨스턴 스테이트 병원에서 그녀를 수술했던 의사는 바로 월터 프리맨이었다. 방법은 전문용어로 ‘경안와뇌엽절리술’(transorbital lobotomy). 간단히 ‘전두엽 절제술’이라고 부르는 이 방식은 뇌의 전두엽 부분을 잘라내면 공격적 성향이 사라진다는 연구 결과에 의한 것이었다. 처음엔 전기 충격 요법과 소라진, 스텔라진, 멜라릴, 프롤릭신 등 각종 항정신병 치료제를 투여했던 닥터 프리맨은 결국 전두엽 절제술을 선택했다.
방법은 무자비했다. 먼저 프랜시스 파머는 얼음이 들어 있는 욕조에 들어가 6시간 이상을 견뎌야 했다. 극심한 추위와 함께 감각이 무뎌지고 결국 실신 상태에 이르자, 그녀는 침대로 옮겨져 수술에 들어갔다.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다.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안구 바로 윗 부분에 날카로운 송곳을 찔러 넣어 얇은 뼈를 뚫은 후 전두엽을 자극하는 방식이었던 것. 그 결과 긴장감과 초조감은 감소할지 몰라도 수술을 받은 사람은 전반적으로 무감각해지고 수동적으로 변하며 창조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놀라운 건 이 수술이 1967년에 금지될 때까지 미국 전역에서 4만 건이나 행해졌다는 사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켄 케시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바로 이 수술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소설이었다.
수술을 받은 후 프랜시스 파머의 병원 생활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참담했다. 그 실상은 예상치 못하게 드러났는데,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1970년대에 사이언톨로지 쪽에서 정신 의학의 폐지를 주장하며 프랜시스 파머를 예로 든 것. 그들의 성명서엔 이런 구절이 있다. “프랜시스 파머가 처한 조건은 정말 야만적이었다. 병원엔 범죄자와 정신적 문제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수용되어 있었다. 식사 시간엔 병원 직원이 와 먹을 것을 군중 속에 던져 주었고, 사람들은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 항상 싸워야 했다. 파머는 지속적으로 전기 충격 치료를 받았다. 게다가 그녀는 인근 군부대의 군인들에 의해 매춘과 강간을 당했고, 병원 잡역부들도 성추행을 했다. 가장 끔찍한 건, 병원 직원들이 붙잡은 상태에서 술에 취한 군인들이 윤간을 하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의사들은 마치 임상 실험을 하듯, 그녀에게 이런저런 약을 복용시켰다.” 이후 병원 측은 강력한 부인을 했고, 병원엔 그녀를 수술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프랜시스 파머는 57세에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녀는 <에드 설리번 쇼>에도 나갔고, 토크 쇼인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에선 호스트인 랠프 에드워즈에게 “나는 알코올 중독인 적이 없었다”며 “난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하는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NBC의 <투데이 쇼> 인터뷰를 통해 미국 전역에 그녀의 건재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40대 후반엔 가톨릭 신자가 되면서 술을 끊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고, 1970년 식도암으로 57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그토록 가혹한 폭력의 대상이 되어야 했을까? 여기에 작용하는 음모론은, 그녀의 강성 이미지가 권력자들에겐 위협적이었다는 가설이다. 당시 이미지 메이킹에만 힘쓰던 일반적인 스타들과 달리, 직설 화법을 구사하는 그녀는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존재였고, 이에 그녀를 주시하던 정보기관은 사소한 기회를 틈 타 그녀를 병원에 가둬 강제로 수술을 시키고 폐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경도된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그룹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 그는 ‘프랜시스 파머는 시애틀에 복수할 것이다’(Frances Farmer Will Have Her Revenge on Seattle)라는 직접적인 제목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공권력에 의해 여성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수모와 고통을 겪고 인권을 유린당했던 프랜시스 파머에 대한 이야기였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