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금융지주의 내분 사태가 계속되자 두 수장에 대한 책임론이 일고 있다. 왼쪽부터 임영록 회장과 사임한 이건호 행장.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지난 4일 오후 “은행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며 “감독당국에서 적절하게 판단하신 것으로 안다”는 말을 남기고 은행장직에서 물러났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이 임영록 KB금융 회장과 이건호 행장에 대해 중징계 결정을 내렸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였다. 임 회장과 이 행장은 지난 8월 21일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에서 경징계 결과를 받았으나 최 원장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금감원장이 제재심 결과를 뒤집는 것은 이례적인 일. 그만큼 KB금융 사태와 두 사람의 갈등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 원장은 임 회장과 이 행장에 대해 “직무상 감독의무를 현저히 태만히 함으로써 심각한 내부통제 위반행위를 초래”했다며 “금융기관의 건전한 경영을 크게 저해했다”고 지적했다.
금융권에서는 금감원장이 제재심 결과를 번복할 만큼 이례적인 결정을 내린 데 대한 책임은 임 회장과 이 행장, 그리고 KB금융 내부에 있다고 질타하고 있다. 지난 8월 21일 제재심 결과 경징계에 그쳐 화합하고 정리·정돈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또 다시 갈등 양상을 보이면서 공분을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금융당국의 ‘괘씸죄’를 자초했다는 얘기다.
제재심의위원회에서 경징계 결과가 나올 때만 해도 KB금융 사태는 그렇게 미봉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곧바로 KB금융그룹 경영진의 템플스테이 행사 소란, 주전산기 교체 건과 관련해 국민은행의 검찰 고발이 잇따르면서 조용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걷잡을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고 말았다.
사퇴 3일 전인 지난 1일 이건호 행장은 국민은행 여의도 본점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며 지주사 임원 2명과 조근철 전 국민은행 IT본부장(상무)을 검찰 고발한 까닭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이 행장은 “보고서 조작에 관련한 범죄자를 고발한 것은 갈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며 “심각한 조작과 은폐를 발견했기에 조직의 수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은행장의 직을 걸고 이것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갈등이 아니다”라던 이 행장의 입을 통해 임영록 회장의 인사 개입이 드러났다. 이 행장은 이를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소명했으며 검찰 고발장에도 처음엔 포함했으나 나중에 뺀 사실을 언급했다. 이 행장은 “변호사들이 제시한 고발장에는 (임 회장의 개입이) 포함됐지만 최종 고발장에는 빠졌다”며 “제재심의위에서 (임 회장의 개입을) 소명한 것은 맞다”고 말했다.
이 행장이 말한 임 회장의 개입이란 지난 8월 26일 국민은행이 지주사 임원 2명과 함께 검찰에 고발한 조근철 전 본부장에 대한 인사를 말한다. 임 회장이 지난해 12월 당시 대림동지점장이었던 조 상무를 새로운 IT본부장으로 추천, 교체했다는 것이다. 이 행장은 “조근철 상무로 IT본부장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임영록 회장이 강하게 권유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행장은 주전산기 교체 건에 임 회장이 포함돼 있음을 알린 것이다. 결국 임 회장과 이 행장 간 인사 개입 등 간섭·갈등이 사태의 원인이었던 셈이다. 검찰은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부장검사 장기석)에 배당해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이 행장이 물러난 상황에서 임 회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부담스러운 데다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힘들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 내부에서도 “(임 회장이) 잘 알아서 판단할 것”이라며 스스로 사임하기를 기다리는 분위기다. 이 행장의 사임 소식 직후 KB금융 내부 관계자는 “(임 회장이) 매우 착잡해 하신다”며 “곧 어떤 결정이 있지 않겠느냐”고 귀띔했다.
최수현 금감원장은 KB금융 경영진 간 갈등과 조직 내 반목을 지적하며 “최고경영자로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 또한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임 회장과 이 행장의 동반 퇴진을 에둘러 표현했다. 특히 임 회장에 대해서는 “은행 IT본부장을 교체토록 하고 이사회에 허위 보고한 행태는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위법행위”라며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관피아·낙하산 인사 철폐’를 주장해온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KB국민은행지부(노조·위원장 성낙조)는 임 회장의 동반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성낙조 위원장은 이 행장 사퇴 직후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KB금융그룹을 위해 이 행장이 옳은 선택을 했다”며 “임 회장도 옳은 선택을 해 경영공백을 최소해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임 회장과 이 행장 모두 외부 출신이라는 점이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재정경제부 제2차관 출신의 임 회장은 전형적인 ‘모피아’로 분류된다. 이 행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 금융권에서 힘을 내고 있는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장 출신이다. 두 사람 다 노조 등에서 ‘낙하산 인사’로 지목, 동반 퇴진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성낙조 위원장은 “은행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금융지주 체제에서 낙하산 인사 간 권력다툼은 이미 예견될 일이었다”며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내부 출신 인사가 회장과 행장을 겸임하는 체제로 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