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철의 등장 이전, 그러니까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무렵까지 바둑 활동을 했던 사람들, 이른바 ‘노국수(老國手)’들의 행적은 우리 근-현대 바둑사의 뿌리를 위해 기록 보관해야 할 중요한 사료다. 노사초 선생은 그 중심인물이었고 실력과 기행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사초’는 아호. 선생의 본명은 석영(碩泳), 집안에서는 근영(近泳)으로도 불렸다.
지난해 12월 기획연재물의 소재를 찾던 바둑 관계 잡지에 노사초 선생의 생가 취재를 제안해 사진기자와 함께 노사초 선생의 생가를 찾아갔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가다가 대전에서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로 갈아타 2시간 남짓 달리니 함양 나들목 바로 전, 지곡 나들목이었다. 나들목을 빠져나가니 금방이었다. 함양은 노씨와 정씨의 고장. 사초 선생의 생가는 조선조의 명신 정여창 선생의 고택 옆이었다. 그때 이미 생가 복원 공사는 시작되어 있었다. 생가는 지금 88세, 86세의 고령의 두 할머니가 지키고 있다. 선생의 막내딸과 며느리다.
생가 취재를 제안한 동기는 몇 년 전에 가보았던 일본 바둑계의 기성 본인방 슈샤쿠의 생가에 대한 추억 때문이었다.
히로시마 앞바다의 조그만 어촌이었다. 마을로 가는 길은 좁았다. 버스가 들어가지 못해 일행은 입구에서 내려 걸었다. 기성의 생가라고는 하나 이렇게 작은 마을인데, 과연 얼마나 잘 보존이 되어 있을까 의아해하는 순간 작은 어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높다랗게 세워진 기둥이 나타났다. 기둥에 씌어 있었다. 15세 본인방 슈샤쿠의 생가. 몇 시간을 둘러보고 돌아나온 짧은 견학이었지만 그날 그때의 감동은 잊혀지질 않았다. 이 조그만 어촌에서 어떻게 바둑사에 길이 남을 기재가 났으며, 어촌의 사람들은 그의 기재를 또 어떻게 알아보고 그 어린 아이를 저 먼 에도까지 바둑 유학을 보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슈샤쿠는 일찍이 그 출중한 기재로 본인방 가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콜레라에 걸려 서른세 살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실제로 장문인의 위치에는 오르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래도 가문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를 본인방이라 부르며 추앙했다. 생가는 잘 보존이 되어 있었고, 생가 옆에는 작은 규모지만 기념관이 있었다. 그 기념관도 그때 칠순 가까운 조카뻘의 친척 할머니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생가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천사령 함양군수를 만났었다. 그 자리에서 천 군수는 “그렇잖아도 몇 년 전에 국수전 도전기도 유치했고 노사초배 바둑대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중단이 되어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노사초배 바둑대회는 내년에 부활시킬 것이고, 그밖에도 노사초 선생을 기념하고 후손에 알리는 여러 가지 사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약속을 지킨 셈이다. 역사는 기록이다. 기록의 보존이다. 그게 문화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