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9일 대선자금 비리와 관련 서울지법에 출두하는 정대철 전 의원. 이때만 해도 의연했던 모습이 최근 들어 눈에 띌 정도로 심기가 불편해졌다고 한다. | ||
최근 정 전 의원을 면회하고 돌아온 인사들 모두 정 전 의원의 심경에 대해 ‘정치권 동료들에 대해 무척 서운해하는 것 같다’고 밝힌다. 얼마 전 면회를 갔던 여권 고위 인사들에겐 역정을 내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아쉬운 감정까지 드러냈다고 한다. 불법 대선자금 관련 혐의로 수감된 정치인들 중 수감 생활에 가장 의연하게 대처해왔던 정 전 의원이 최근 들어 눈에 띌 정도로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정 전 의원은 주변 인사들에게 제법 ‘편안한’ 모습을 보여줬다. 측근들은 물론 면회 다녀온 인사들에게서 정 전 의원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는 말은 ‘책 많이 읽고, 식사 잘 하고, 운동 잘 하고…’ 같은 수감생활에 잘 적응하는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면회 온 인사들에게 정 전 의원은 정치권 중진으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입각을 두고 고민하던 김근태 의원이 6월 초순께 정 전 의원을 찾아와 입각문제와 관련한 고민을 정 전 의원에게 털어놓았다. 이 때 정 전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은 원칙주의자고 주장이 확실한 분이니 노 대통령이 권유하는 대로 따르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으며 결국 김근태 의원은 보건복지부장관직을 맡으며 입각했다.
4·15총선에서 낙선한 민주당 추미애 전 의원과 김상현 전 의원, 김경재 전 의원도 차례로 정 전 의원을 찾았다. 수감중인 정 전 의원은 오히려 이들을 일일이 위로하며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다시 뭉쳐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총선 이후 위축된 당 위상에 절망하던 일부 민주당 인사들이 면회왔을 때도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던 정 전 의원의 심기가 지난 6월12일 김원기 국회의장의 면회를 전후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날 오랜만에 정 전 의원을 찾아온 김 의장에게 정 전 의원은 대뜸 “뭐하러 왔느냐”며 역정을 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측근들은 ‘감옥에 계속 이대로 내버려 둘 작정이냐’는 식의 아쉬움의 표현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정 전 의장이 화를 계속 내는 바람에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정 전 의원에게 여러 번 면회를 갔던 한 주변 인사는 “정 전 의원이 내심 형집행 정지 같은 것을 기대한 것 같다. 정 전 의원은 면회 온 사람들에게 늘 평온한 모습을 보여줬고 ‘내가 곧 나가면…’ 같은 말을 자주 했다. 당장 구치소를 나온다거나 다가올 재보선에 출마한다는 생각까지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당선 1등 공신인 자신을 여권 핵심부가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으로 보고 가까운 미래에 경륜을 바탕으로 정치적 중재를 담당하는 역할을 꿈꾸며 하루 하루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고 면회 후일담을 전했다.
최근 정 전 의원 면회를 다녀온 여권 고위층의 한 관계자는 “여권의 몇몇 인사가 ‘노 대통령 측근들도 모두 실형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정 전 의원도 중형을 피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전망을 (정 전 의원에게) 전한 것 같았다. (정 전 의원이) 상당히 실망한 것으로 보였다”고 밝혔다. 즉, 여권 핵심부가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던 정 전 의원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느끼고는 낙담하던 중에 김원기 의장이 방문했을 때 분노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정 전 의원과 더불어 친노 중진 그룹 역할을 맡아 노 대통령의 대통령 후보직 수성과 대통령 당선을 이끌어낸 동지이자 노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이기도 한 김 의장조차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가 표출됐다는 것.
같은 날 이해찬 총리가 정 전 의원을 면회하기 위해 서울구치소를 찾았다. 당시 총리 후보자 신분으로 ‘옛 동지’를 찾은 이 총리는 그러나 정 전 의원으로부터 심한 타박을 들어야 했다고. 정 전 의원은 이 총리에게 ‘이회창 전 총재도 면회를 오는데 왜 노무현 대통령은 아무도 보내지 않느냐. 비서실장은 발이 없냐’는 식의 말을 퍼부었다고 한다. 뜻밖의 중형을 선고받아 무거워진 속내를 총리 ‘후보자’ 딱지도 떼지 못한 상태인 이 총리에게 퍼부은 셈이다.
한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이 총리가 면회 오기 하루 전인 6월17일 서울구치소를 방문해 정 전 의원을 비롯한 정치인 출신 수감자들을 만나 위로를 전했다.
정 전 의원이 이 총리에게 노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바로 다음 날인 6월19일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정 전 의원을 찾아가서 위로를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7월5일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몇몇 의원들을 데리고 서울구치소를 방문해 정 전 의원을 만나기도 했다.
민주당 대표 시절 정 전 의원 비서실장을 지낸 민주당 이낙연 의원은 “얼마 전 면회를 갔을 때 정 전 대표는 몸무게가 10㎏ 넘게 빠져 보였으며 옛 동료들에 대한 서운함도 갖고 있더라”고 밝혔다.
여권 고위층의 한 관계자는 “최근 정 전 의원을 면회간 여권 고위 인사들은 정 전 의원으로부터 좋은 소리 못 들었다. 면회 갔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정 전 의원으로부터 ‘내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고 밝혔다. 불법 대선자금의 시시콜콜한 면까지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정 전 의원의 ‘입’이 여권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여권 고위 인사들이 앞으로도 계속 정 전 의원을 찾아가서 달래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얼마전 정 전 의원 면회를 다녀온 정 전 의원 측근들과 민주당 소속 인사들에게 정 전 의원은 열린우리-민주 재통합을 역설했다고 한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모두 분당과정에서 잘못이 있지만 총선을 거치며 민주당이 완패한 것이나 6·5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고배를 마신 것 모두 분당과정의 부작용이란 것이다. 정 전 의원은 국회의원이나 공식 직함이 없더라도 그동안 쌓인 인맥과 경륜을 바탕으로 정치적 중재 역할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면회 온 인사들에게 열린우리-민주 재통합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장기 수감 생활이 이어질 경우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경우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할 게 뻔하다.
정 전 의원의 한 주변인사는 “정 전 의원이 1심에서 선고받은 6년 징역을 다 살지는 않겠지만 1~2년 안에 풀려나지 못한다면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이제 끝나는 것 아니겠나. 정 전 의원도 이런 점을 잘 알기에 더욱 더 괴로울 것”이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