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응찬 전 신한지주 회장과 신상훈 전 사장. 왼쪽은 김기식 의원과 참여연대가 공동으로 공개한 2010년 신한사태 당시 신한은행 비상대책위원회 관련 문건. 일요신문 DB
이 문건들에는 지난 2010년 9월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이 신상훈 당시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횡령과 배임 혐의로 고발하면서 외부로 터져 나온 신한은행 내부의 권력다툼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짐작케 하는 충격적인 내용들이 담겨있다. 또 지난해 등장했다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 신한은행의 불법 계좌 조회와 계좌 추적이 실제로는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정황들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다.
우선 신한 사태를 요약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지난 2009년 3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라응찬 당시 회장의 비자금과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간의 거래 의혹에 대한 내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이듬해인 2010년에는 라 전 회장이 차명계좌를 운영하며 금융실명제법을 위반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당시 회장직 4연임에 성공하며 오너 같은 전문경영인으로 신한금융을 틀어쥐고 있던 라 전 회장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리더십에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특히 당시 라 회장과 신한금융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2인자’로 급부상한 신상훈 사장의 존재는 라 전 회장과 그의 추종세력들에게 큰 위협이 됐다.
당시 신 사장 다음인 ‘넘버3’는 핵심 계열사인 신한은행을 이끌고 있던 이백순 은행장이었는데,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라 전 회장은 그를 끌어들여 ‘신상훈 제거 작전’에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자료제공=김기식 의원실
이들은 곧바로 신한금융 내 핵심인사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우선 실세 가운데 한 명이던 K 부행장이 합류했다. 현재 신한금융 계열사 고문을 맡고 있는 K 씨는 문제의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스스로 위원장을 맡았다. K 씨는 비대위에 △신상훈 사장의 대출비리 조사 △횡령 관련 계좌조사 △홍보 및 대외공작 △노조와 직원, 주주, 법무 등 내부관리, 4개 팀을 설치하고 핵심 임원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넓혀나갔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비대위에는 영업본부와 기획, 인사 등 핵심 부서를 필두로 고객관리, 홍보, 감사, 준법감시 등 다양한 부서의 임원과 부서장급들이 합류했다. 순식간에 세력을 불린 ‘라응찬 회장파’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신상훈 당시 사장을 칠 명분을 잡기 위해 대대적인 여신조사와 계좌추적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내부 임직원은 물론 이들의 가족과 재일동포 주주들까지 함부로 파헤쳐졌고, 결국 고객과 거래기업의 개인정보까지 손대는 상황이 벌어졌다. 검찰조차 영장 없이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계좌추적이 일개 금융사 임직원들에 의해 행해졌던 셈이다.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는 사실에 뒷일이 걱정됐는지 퇴로를 열어둔 흔적도 포착된다. 문건 첫 페이지 우측 상단의 은행장 직인란에는 다소 특이한 사인이 눈에 띄는데, 이는 이백순 당시 은행장의 것이 아니라 비대위원장을 맡았던 K 씨의 글씨다. 그는 은행장이 사인해야 할 곳에 자신의 성을 한자 약자형식으로 쓴 뒤 대리결재했음을 뜻하는 ‘대(代)’ 자를 옆에 써뒀다.
금융권은 이 사인에 대해 “결재권자는 은행장이지만 해당 문건에는 사인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는 만큼 ‘처음 보는 문서’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면서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책임을 지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 적어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신한금융그룹 본사 입구. 일요신문 DB
5개월 동안의 치밀한 준비를 마친 이들은 2010년 9월 2일 신한은행 명의로 신상훈 사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검찰에 전격 고소했다. 은행이 은행장 출신이자 금융지주사 사장을 고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른바 신한 사태는 이날부터 본격화됐다.
4년여가 지났지만 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격렬한 다툼은 보이지 않지만 신한금융 내부에서는 ‘라응찬파’와 ‘신상훈파’가 여전히 물밑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특히 신한 사태에서 사실상 라응찬파가 완승을 거두면서 이들은 신한금융그룹의 주류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반면 인사조치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신상훈파’는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는 형국이 계속되고 있다.
라응찬파의 득세는 지난해 말 불공정 논란 속에서도 연임에 성공하며 독주하고 있는 한동우 현 신한금융 회장의 행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회장은 라응찬 전 회장 계열로 분류되는데, 라 전 회장의 수렴청정이 거론될 때면 어김없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인물이다.
라응찬 전 회장과 그의 우호세력들에 관해서는 지금도 금융감독원의 조사와 검찰 수사 등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의혹만 있을 뿐 실제로 밝혀진 진실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이번에 폭로된 비밀조직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을지는 두고봐야할 전망이다. 참여연대는 조만간 라 전 회장의 측근들을 검찰에 다시 고발할 예정이다. 금감원도 조만간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고 신한은행의 불법 계좌조회에 대한 징계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