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가능성에 대한 관측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디데이는 10월 14일. 부산아시안게임 폐막일이란 구체적인 답방 날짜까지 거론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판문점을 통해 답방→도라산역까지 육로 이동→김대중 대통령 상봉→부산까지 기차로 이동→폐막식 참석’이란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거론되는 실정이다.
김 위원장의 답방 징후는 8월 이후 여러 방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감지됐다. 북한이 부산아시안게임에 선수단을 파견하고, 대규모 응원단까지 파견한 것도 답방 징후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 해방 이후 최초로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아셈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했는가 하면, 미국에서 켈리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대북특사로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가능성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시나리오가 무르익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0년 6월 만난 남북정상. | ||
≪징후1≫ 김대중 대통령의 화법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배경에는 그해 3월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이 있었다. 김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을 통해 남북특사교환을 제의했고, 곧이어 남북간에는 박지원-송호경 특사의 비밀 접촉이 이뤄졌다. 몇 차례 특사접촉을 통해 남북간에는 정상회담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베를린 선언이 있은 지 한 달여 뒤인 4월10일 이를 공식발표했다.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발표된 뒤 두 달여 실무팀이 꾸려져 남북정상회담의 의제와 방법 등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끝에 6월13일부터 15일까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2002년 10월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성사 가능성이 거론되는 배경에는 지난 9월 아셈 정상들의 ‘결의문 채택’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 각국 정상들이 참석한 아셈회의를 통해 ‘남북간 평화 증진을 위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던 것.
아셈회의에서 주의제와는 별도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된 데에는 우리 정부와 김대중 대통령의 숨은 노력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란 예상이다. 즉, 해외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 정상간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실무적인 절차를 밟았던 2000년의 경험이, 2002년에도 재연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5년 재임 동안 남북화해 증진을 가장 큰 치적으로 여기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과 청와대가 퇴임을 5개월여를 앞두고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노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징후2≫ 변화하는 동북아 정세
9월17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은 남북관계는 물론, 동북아 정세에 급격한 변화를 몰고 온 단초가 됐다. 특히, 고이즈미 총리 방북 이후 아셈회의에서 ‘김정일 위원장 답방 촉구 결의문’이 채택됐고, 미국에서는 켈리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10월3일 북한에 특사로 파견할 예정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계기로 9•11테러 이후 대북한 강경노선을 유지해왔던 미국의 기존의 태도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 파격적인 경제개방 개혁 조치를 발표하고, 신의주 특구를 지정, 발표하는 등 자구책을 강구함으로써 미국의 강경노선에 밀려 수세적 입장에 놓여있던 북한이, 적극적, 주도적으로 태도를 선회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어찌됐건 부시 행정부 출범과 지난해 9•11테러로 인해 단절됐던 북•미간 대화가 재개되고 동북아 정세가 북한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국제사회에 말 그대로 변모된 모습을 보여줘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됐다.
≪징후3≫ 봇물 이루는 남북이벤트
최근 한국은 북한에 대한 다양한 뉴스들을 접하고 있다. 추석을 전후해 이뤄졌던 제5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의례적인 일로 여겨질 정도다. 9월 중순 KBS에서는 교향악단과 보도진을 포함 1백여 명 이상이 평양을 방문했다. 남북간 주요 행사에 KBS 기자가 직접 현장을 취재 보도했는가 하면, 추석 당일에는 평양에서 평양 시민을 대상으로 교향악단의 연주가 있었다. 남한에도 생방송됐음은 물론이다. 민족의 명절을 맞아 남북한 국민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이벤트가 평양에서 이뤄진 셈이다.
9월 하순에는 MBC가 주최하는 평양 공연이 열렸다. 가수 이미자를 비롯, 윤도현 등 남한의 신구세대 음악인들이 평양에서 직접 공연을 했다. 두 방송사의 이벤트가 주로 평양 등 북한에서 진행됐다면, 9월 말부터는 북한 주민들이 대거 남한에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부산아시안게임에 참석한 북한 선수들과 함께 미인들로 구성된 대규모 응원단이 그것. 특히, 부산아시안게임 내내 북한 선수들의 활동상은 물론 응원단의 일거수일투족도 주요 언론매체 등을 통해 연일 보도될 전망이다. 이같이 남북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벤트성 행사들은 한 가지 공통된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바로 ‘하나된 조국’. 그러나 이벤트는 어디까지나 이벤트에 불과하다. 몇 번의 공연이 ‘하나된 조국’을 이루는데 50년간 단절된 감정의 장벽을 누그러뜨릴 수는 있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근 남북한에서 진행된 몇 차례의 이벤트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위한 분위기 조성용 이벤트가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징후4≫ 관계기관 대책회의
지난 9월 중순 국정원장 공관에서는 신건 국정원장 주최의 만찬 모임이 있었다. 주요 참석자는 박지원 비서실장, 박권상 KBS 사장, 정대 조계종 총무원장이 참석했다. 단순한 만찬 모임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최근 급변하는 남북 정세와 연관지어 해석해보면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비공식 대북채널을 가동하고 있는 국정원의 수장과 대북 특사로 활동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박지원 실장의 회동은 단순한 만남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평양 공연을 앞두고 있던 박권상 KBS 사장이 합류한 것도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즉, KBS에서 대북 행사 등을 통해 분위기를 띄우고, 국정원에서는 비밀 접촉 등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타진하는 한편, 청와대를 중심으로 회담 등 답방에 따른 후속조치를 준비하려는 회동이 아니었느냐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셈회의 참석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직접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김정일 위원장 답방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등 그 어느때보다 많은 주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대북관계를 전담하고 있는 임동원 특보에게 많은 주문이 쏟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도 통일부 김형기 차관은 한 사석에서 ‘유명한 무속인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이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을 예언했었다’며 ‘그 무속인이 또하나 예언한 것이 있는데, 바로 아시안게임 때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한다는 것이다’고 언급, 김정일 위원장의 아시안게임 기간중 답방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지난달 18일 도라산역 인근 남방한계선에서 열린 경의선 철도 연결착공식. 일부에선 김정일 위원장이 경의선 개통 후 ''통일열차''를 타고 내려올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사진공동취재단> | ||
통일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북한은 6•15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위원장 답방과 관련,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김 위원장이 환영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북한 주민에게 줄 선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최근 남북 경협을 통해 쌀 40만t과 비료 10만t을 북한에 제공키로 합의가 된 것은 북한 주민에게 줄 선물로 여겨질 만하다.
그러나 최근 정치권의 ‘정상회담 대가 제공’ 공방은 북한이 제시한 첫 번째 조건, 환영받아야 한다는 조건에 역행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의 중요한 통치이념 중의 하나인 ‘이신작칙(以身作則 행동으로 규칙을 만든다)’을 ‘답방 조건’에 앞서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답방’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특히,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맞춰 답방하게 된다면, 경기장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이끌어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1천여 명에 이르는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은 ‘답방’과 관련,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인간적인 의리 측면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관계기관의 한 인사는 “답방 조건도 조건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답방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김정일 위원장이 갑작스레 답방을 결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현 상황에서는 어려워 보인다”며 “오히려 아시안게임 폐막식에는 명목상 북한을 대표하고 있는 김영남 중앙위원장이 방한하고, 경의선이 개통되는 11월쯤 ‘통일열차’를 타고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