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광역수사대로 전주시 중화산동의 한 유흥업소 업주 고 아무개 씨(여·42)가 찾아왔다. 유흥업소를 수년간 운영하며 잔뼈가 굵었던 고 씨는 자신이 당한 사연을 경찰에 털어놨다. 고 씨는 “지난해 11월 중순 김 씨 등 두 명의 아가씨가 찾아와 선불금을 주면 종업원으로 일하겠다고 해 일인당 2500만 원을 송금해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출근하겠다던 김 씨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고 씨는 영업시간이 지나도 아가씨들이 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남겨놓은 번호로 전화를 했지만 고객의 요청으로 수신이 거절됐다는 음성만 나왔다. 그때서야 고 씨는 업소를 소개받아 선불금만 챙기고 곧바로 달아나는 속칭 ‘탕치기’ 수법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씨는 분한 마음에 김 씨 등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3개월 만에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고 씨의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고 씨의 신고 이후 이와 유사한 피해를 입었다는 업주들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군산, 목포, 통영, 김해, 대전 등 전국에서 전화가 왔다.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무리를 지어다니며 조직적으로 업소들을 울리는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전주 및 다른 지역 유흥업소를 돌며 김 씨 등을 찾기 위해 탐문수사를 펼쳤다. 그러나 그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해 그 행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게 마련. 지난 4월 27일 경찰은 전주에 다시 등장한 김 씨 등 네 명의 아가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한다.
범인은 자신이 저지른 범행 장소에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지역에서 ‘탕치기’를 일삼던 일행이 5개월 후 자신들이 쉽게 한 건을 올렸던 전주로 다시 들어왔던 것이다. 미리 다른 유흥업소 업주들에게 탕치기 위험을 알린 고 씨가 모 업소에 김 씨 등이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에 신고해 검거할 수 있었다.
당시 김 씨 등을 검거한 경찰은 “우리가 나타나자 김 씨 등이 흠칫 놀랐다”며 “합의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범행을 부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구속이 되자 그때서야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경찰 조사를 통해 드러난 김 씨 등의 ‘탕치기’ 수법은 놀랍도록 치밀했다. 개별적으로 치고 빠지던 기존의 수법과는 달리 이번 경우는 조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 이들은 박 아무개 씨(여·28) 등 20대 여성 6명과 함께 서너 명씩 조를 짜서 움직였다. 내륙에서 주로 자동차로 이동하며 ‘활동’했지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유흥업소에까지 진출해 작업을 벌인 적도 있었다. 이들은 룸살롱, 다방, 노래방 등 모든 유흥업소를 타깃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조직폭력배 주 아무개 씨(50) 등 2명이 보호자 역할을 하며 함께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주 씨 등은 조직폭력배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지 않아 실제 조폭인지는 더 조사해봐야겠지만 문신을 새겼고 아가씨들에게는 조폭 행세를 해왔다”고 말했다.
주 씨 등은 이들 여성들이 받은 선불금의 50%를 보호비 명목으로 받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한 업소에서 아가씨들이 1000만 원을 받으면 500만 원을 주 씨 등에게 줬던 것이다. 특히 주 씨 등은 유흥업소와 여성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담당했다. 이들은 그동안 전북과 경남 등 전국을 돌며 20여 차례에 걸쳐 3억 원 상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의 수법은 항상 똑같았다고 한다. 늘씬한 몸매와 미모의 아가씨들이 업소에 접촉해 일을 하고 싶다고 제의하면 업주들이 선뜻 선불금을 줬고 선불금을 받으면 곧바로 잠수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아가씨들이 두세 명씩 패거리를 꾸려 ‘탕치기’를 하며 돌아다니다가 지난해 11월쯤에 서로 소개를 통해 만나 함께 일하게 됐다고 한다. ‘꾼’이 ‘꾼’을 알아본 것이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미녀 군단’은 업주들을 속여 받은 선불금의 대부분을 도박과 명품 구입, 유흥비 등으로 탕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기를 통해 쉽게 번 만큼 씀씀이도 헤펐던 것이다.
김 씨 등은 그동안에도 탕치기로 경찰에 입건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업주들은 자신이 피해를 입은 금액을 돌려받는 게 우선이라 김 씨 등이 ‘돈을 갚을 테니 합의를 해달라’고 요구하면 대부분 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때문에 이들은 문제가 되면 합의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고 계속 ‘탕치기’ 범행을 저질러 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들은 피해자들과 서류상으로만 합의하고 잠적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한두 번 성공하다보니 자신감이 붙어 좀 더 대담하게 조직적 범행을 해왔다고 한다.
아가씨들의 남자친구들도 경찰조사를 받았는데 이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여자친구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전국의 유흥업소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는 걸 몰랐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은 그동안은 실수로 빚어진 일이라 생각하고 합의금을 마련하는 데도 도움을 줬다고 한다. 경찰은 김 씨 등 네 명 외에도 달아난 박 아무개 씨(여·28) 등 20대 여성 6명과 이들을 관리해온 주 씨 등 2명을 지명 수배, ‘미녀군단’의 잔당들을 뒤쫓고 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사실 아가씨들이 며칠쯤 일을 하고 2차를 나간 뒤 도망쳤다면 피해자인 업주들도 다칠 수 있어 신고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하루도 일하지 않고 ‘탕치기’를 했기에 사건이 밝혀질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전주=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