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원화 대비 엔화 가치가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인 100엔당 940원대로 떨어졌다. 같은날 현대자동차 주가는 엔저 공포 등으로 크게 추락하며 시총 2위 자리도 내줬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4일 서울 종로구 한 금융정보회사 모니터에 표시된 현대차 주가. 연합뉴스
지난 10월 초 불어 닥친 우리나라 경제에 대한 우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지난 수년간 저성장 기조를 이어오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경제가 내년에는 심각한 수준으로 얼어붙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 모습이 마치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던 지난 2008년의 직전과 흡사하다고 말하는 재계 인사도 적지 않다. 기업들의 실적 부진과 구조조정 바람, 주가 폭락이 대표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재계 일부에서는 심지어 내년 경제가 IMF 외환위기 때 못지않을 만큼 혹독한 시기를 보낼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한다.
한국은행조차 지난 10월 발표한 <경제전망보고서>에서 내년 경제에 대해 “경기 회복 모멘텀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할 정도다. 재계 관계자는 “내년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로 수출 부문이 꽤 어려워질 것”이라며 “수출 부문이 어려워지면서 기업들의 투자·고용 위축, 소비 침체로 이어져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한국금융연구원 등 국책연구기관을 비롯해 주요 민간 경제연구소들이 전망하는 2015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3%대 중후반이다. 한국은행과 LG경제연구원 등이 3.9%를 예상했고, 하나금융연구원과 한국경제연구원 등이 3.7%를 전망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3.6%로 낮춰 잡았다.
주요 경제연구기관들의 내년 경제 전망에 대한 보고서를 보면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재계 일부에서 오가는 글로벌 금융위기나 IMF 외환위기 당시의 충격 같은 일을 예견하지는 않는다. 이정협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전 세계적인 저성장 기조에 따라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역시 낮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상수지·외환보유고 등 부문에서 체질이 개선돼 외부 충격을 견뎌낼 능력은 갖추고 있다”며 “외환위기 때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내년 우리 경제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곳은 LG경제연구원이다. LG경제연구원은 지난 9월 낸 <2015년 국내외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우리 경제에 대해 “회복 국면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며 “국내 경기의 회복 기조 자체는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또 “성장에 비해 고용이 확대되고 물가가 안정되는 흐름이 이어질 전망”이라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수 회복이 완만한 수준에 그칠 전망”이라며 “중기적으로 우리 경제가 4%대 성장을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우리 경제의 어려움이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다.
LG경제연구원의 이 같은 전망은 그러나 불과 2개월 사이에 확 바뀌었다. 보고서를 발표한 9월 이후 지난 2개월간 우리 경제가 심하게 악화했다는 것이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미국 경기가 회복되면서 우리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봤으나 중국, 일본, 유럽 등 다른 나라 경제 상황이 예상보다 안 좋아지면서 내년 우리 경제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고 잘못하면 3% 성장도 힘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LG경제연구원이 지난 9월 예상한 내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3.9%다. LG경제연구원은 내년 경제 전망과 관련해 올 연말쯤 보고서를 다시 한 번 발표할 예정이다. 3개월 사이에 보고서를 새로 낼 정도로 우리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의미다.
이근태 수석연구위원은 엔화 약세의 심각성도 지적했다. 그는 “엔화 약세는 장기적인 추세고 원화 약세는 단기적인 현상”이라며 “기준금리를 낮춰서 발생하는 부작용보다 인하 효과가 더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엔화 약세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달러 대비 원화도 약세여서 크게 불리하지 않다”며 기준금리를 인하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피력한 것에 반대되는 의견이다. 이 수석연구위원뿐 아니라 기준금리 인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제전문가들은 적지 않다.
이 같은 예상으로 볼 때 내년 우리 경제 전망에 빨간불이 켜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더욱이 내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수출 감소, 고용의 질 하락, 소득 감소 등의 영향으로 내수가 올해보다 더 침체되면 우리 경제가 돌이키기 힘든 상황까지 내몰릴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부의 내수활성화 정책의 효과가 미미한 데다 어느 정도까지 발휘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잠실의 한 부동산에 붙어 있는 시세판과 대형마트 매장 내부 모습.
내수 진작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건설·부동산 경기 활성화가 꼽힌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방법에 고개를 젓는다. 이근태 수석연구위원은 “쉽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방법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현대경제연구원 역시 내년 우리나라 경제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10월 2일 발표한 <2015년 한국경제의 주요 특징과 경제전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내년 우리 경제성장률을 3.6%로 예상했다. 주요 경제연구기관 중 가장 낮은 수치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저성장·저물가 기조가 장기화되면서 디플레이션 우려가 지속될 것”이라며 “수출은 수요부족 발(發) 세계경기 장기 부진과 대중국 수출 부진, 엔저 공포로 힘든 한 해를 겪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정협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달러 강세보다 엔화 약세가 더 큰 문제”라며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등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는 일본과 경쟁하는 품목이 많은데 엔화 약세로 덜 팔릴 것이고 수익성이 악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실장이 지적한 수출경쟁력 하락은 소비 위축과 내수 침체로 이어지면서 우리 경제의 전반적인 부진을 초래한다.
이 실장은 특히 우리 경제의 중장기적 침체 요인으로 저출산·고령화와 이에 대한 대응 부재를 지목했다. 이 실장은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경제 활력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라며 “경제활동인구 감소도 문제지만 소비 침체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활동 기간 동안 소득이 있어도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소비하지 않고, 은퇴 후에는 소득이 없으므로 소비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 이 실장은 “이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너무 먼 미래의 일로 여기는 탓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게 큰 문제”라며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 경제가 중장기적 침체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포스코경영연구소 역시 내년 경제를 어둡게 내다보고 있다. 포스코경영연구소는 지난 5일 발표한 <2015 경제전망>에서 △소득부진-부채증가 △내수-수출 불균형 △인구감소 △기업 투자의욕 저하 등 구조적 요인으로 중장기 성장 동력이 약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포스코경영연구소는 최근 우리나라의 내수 추세를 “일본의 장기 불황이 시작되던 시기와 소비 둔화, 투자 부진의 패턴이 상당 부분 유사하다”며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할 경우 중장기 성장세가 하락할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현석원 포스코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보고서와 달리 심각한 단계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는 “내년 국내 경제에 불확실성이 상존하고 있고 체감 경기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수치상으로만 보면 나쁘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비록 내년 경제성장률을 3.7%로 잡고 있지만 잠재성장률이 4% 미만인 것을 감안하면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것.
현 수석연구원은 “관건은 소폭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출이 민간 소비로 어떻게 잘 흘러들어오느냐다”며 “올해는 세월호 여파가 컸던 만큼 내년에는 고용지표 등을 개선해 민간 소비 활성화에 노력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현 수석연구원 역시 앞서 보고서에서 언급한 문제들을 우리 경제의 중장기적 해결 과제로 지적하고 이를 꼭 풀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KB경영연구소는 다른 곳과 달리 정부의 확장정책에 기대를 걸고 있다. KB경영연구소는 지난 5일 발표한 <2015년 국내외 경제전망>에서 “국내 경제는 대외경기의 회복세와 정부의 강력한 확장정책으로 금년보다 성장률이 다소 높아질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역시 불확실성이다. KB경영연구소는 “대내외 경제 불확실성 등으로 회복력은 크지 않은 모습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김선태 KB경영연구소 이코노미스트는 “대외경기 변수와 수출 부문에서 좋지 않은 시그널이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수출이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큰데 이제는 수출이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신호가 발생한 지 오래됐고 이러한 점들이 성숙해가는 시기에 위험 요소가 많이 포진해 있을 수밖에 없다”며 “다만 이 같은 구조적 문제와 위험 요소가 확산되지 않도록 정책 부문이나 금융 부문이 안정적으로 운용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이코노미스트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기에 우리 경제를 너무 비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기업 관계자들은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의미 없다”고 잘라 말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1998년 IMF 외환위기를 떠올리고 있는 현장에서 3%대의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주는 효과와 기대는 거의 없다는 얘기다.
한 대기업 고위 인사는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가 둑이 한꺼번에 무너진 경우라면 지금은 늪처럼 서서히 빠져들고 있는 상황”이라며 “체감으로는 그때만큼 절박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나 점점 더 헤어 나올 수 없는 지경까지 깊어지고 있으며 그 바닥이 어딘지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다”고 걱정스러워했다. 이 인사는 또 “달러 강세, 엔화 약세, 중국 경기 경착륙 등 우리 경제를 위협하는 요인들이 문제가 된 것은 수년 전부터”라며 “문제가 계속된다는 것은 언젠가 실현된다는 의미를 띠고 있어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기 회복에 기대를 거는 인사도 있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워낙 대외변수가 많아 내년 경제를 전망하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계절적으로 비수기인 점을 감안하면 미국 경기가 살아나는 등 회복 기미가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 인사들은 대체로 내년 우리나라 경제가 큰 고비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수출이 어려워지고 내수가 침체해 도무지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특히 세계 경기 부진과 내수 침체가 겹치면서 기업들의 생산활동이 위축되고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여러 기업이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은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며 “이미 여기저기서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를 나오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또 다른 대기업 임원은 내수 침체와 가계 부채가 내년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 원인들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임원은 “집을 사기 위해 대출받는 게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대출을 받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며 “사람들이 돈이 있는데도 소비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으니 물가가 하락하는데, 그래도 소비하지 않는, 디플레이션의 가속화·장기화가 우려스러울 정도”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 같은 심리적·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종합해볼 때 내년 우리나라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전문가들의 견해대로 외부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금융 부문에서 체질이 강화되고 단련돼 있기는 하지만 수출 부진과 내수 침체 등으로 세계 경기 회복세에 동참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의 경기 활성화 대책의 효력에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우리 경제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전문가들은 정책적 부문에서 위기가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