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더 리더>의 한 장면. | ||
교복 입은 소녀, 섹시한 간호사, 금발 미인, 채찍을 든 캣걸, 수갑을 든 경찰관, 스리섬, 스와핑, 부카케…. 남자에게 섹스 판타지를 물으면 대상부터 섹스 체위까지 그 대답이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섹스 개방형 시대에도 여자에게 섹스 판타지를 물으면 90% 이상이 “그런 거 없어” “생각해본 적 없어”라며 얼굴에 홍조를 띤다. 섹스 판타지가 있다고 고백한 나머지 10% 여자들의 답변도 그리 변변치 않다. “낯선 남자와의 섹스”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의 섹스” 등으로 에둘러 답하는 것.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실제 정사도 아니고 한낱 판타지일 뿐인데도 대한민국 여자들은 섹스에 대해 예의를 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판타지에도 솔직하지 못한 이유는 대한민국에 아내를 성녀로 보는 보수적인 남자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여자들끼리 음담패설이 시작되면, 여자들이 AV 업계를 강타할 만큼 충격적인 판타지를 숨기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강간 판타지는 기본이고, 욕조 섹스, 아이스크림(혹은 초콜릿)을 묻힌 페니스를 오럴 섹스하는 것, 가슴을 모아 그 안에 페니스를 넣고 섹스하는 것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펼쳐지는 것이다.
재닛 잭슨은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비행기에서 섹스를 한 적이 있다. 화장실이 아니라 좌석에서”라고 깜짝 고백을 했다. 아무리 비즈니스 클래스의 1등석이라고는 해도 사람들이 오가는 비행기 좌석에서 섹스를 하다니! 관중의 낌새를 눈치 챈 재닛 젝슨은 섹스 심벌답게 당당히 말했다. “Why Not?” 비행기에서의 섹스가 재닛 잭슨에게 최고의 섹스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그녀가 그때의 스릴 넘치는 섹스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캠핑카에서 원 나이트 스탠드를 했다는 후배 A의 섹스담이 떠올랐다. A는 “창밖에서 별이 쏟아져 내리지, 바람은 후끈하게 불어오지, 파도소리는 들려오지…. 그 상황에서 안 넘어갈 여자가 있겠냐고. 친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서 좀 불안하긴 했지만, 그게 또 스릴이 넘치더라구”하고 고백하면서 “내 일생 최고의 섹스 장소였어”라고 소감을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후배 B는 “나는 수영장에서 섹스하고 싶어. 물속에서 알몸이 되어 남자를 받아들이는 기분이 정말 남다를 것 같아. 욕조에서의 섹스도 기대돼. 손으로 거품을 내어 서로의 가슴, 성기 등을 구석구석 닦아주면서 전희를 하는 거야. 변기 뚜껑 위에서 그와 내가 마주 앉은 자세로 섹스를 하는 것이 내 섹스 판타지야”라고 맞받아쳤다. 이 외에도 회사의 비상구에서, 천장에 거울이 있는 모텔에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오픈카를 주차하고 섹스하고 싶다는 등 에로틱한 분위기를 달구는 장소에 대한 여자들의 판타지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물론 섹스의 방법에 대한 판타지도 각양색색 다채롭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수갑이 채워져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로 섹스를 하게 되는 강간 판타지는 흔하다. 영화 <녹색의자>에서처럼 하루 종일 섹스만 하고 싶다(배가 고프면 자장면을 시켜먹으면서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섹스만 하고 싶다는 거였다)는 후배가 있는가 하면, 1년의 동거 생활을 거친 후 섹스의 달인이 된 친구 C는 “스무 살 꽃띠의 숫총각과 섹스를 해보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어쩔 줄 모르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흥분될 것 같아. 하나하나 가르치면서 최고의 절정까지 함께 누려보는 거지”라고 말하는 등 여자들의 섹스 판타지는 매우 다양하다. 살짝 귀띔을 하자면, 나의 섹스 판타지는 눈을 가린 섹스다. 그가 눈을 가린 내 몸을 애무할 때마다 기대감과 공포가 섞인 감정으로 몹시 흥분될 것 같으니까.
흥미로운 사실은 남자가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대상과의 충격적인 섹스 형태를 판타지로 삼는데, 여자는 ‘그와 이런 섹스를 하고 싶다’라는 소소한 바람을 섹스 판타지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 남자의 섹스 판타지는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요구하기 미안할 정도로 파격적인 섹스이기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해서 판타지로 남은 어떤 것이다. 설사 남녀 서로의 합의 하에 시도했다 하더라도, 그날 섹스의 기억이 너무 강해서 앞으로의 섹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라면 도전하기 어렵지 않나. 그런데 여자의 판타지는 다르다. 남자친구와의 섹스에도 충분히 실현이 가능하고, 앞으로의 섹스에도 자극이 될 판타지인 경우가 더 많다. 오늘 밤, 그녀의 판타지를 실현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순서로, 낯선 장소에서 밤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만족할지 누가 아는가.
박훈희 칼럼니스트
박훈희 씨는 <유행통신> <세븐틴> <앙앙> 등 패션 매거진에서 10년 이상 피처 에디터로 활동하면서 섹스 칼럼을 썼고, 현재 <무비위크>에서 영화&섹스 칼럼을 연재 중인 30대 중반의 미혼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