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김정일 가문의 여인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여동생 김경희 노동당 경공업부장이다. 1994년 7월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이후 공개석상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췄던 김경희 부장은 최근 김정일 위원장의 현장방문식 통치활동에 수행하고 있다. 북한 관영매체들이 그녀를 남편인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보다 먼저 호칭하면서 그의 파워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정운 후계 내정과 때를 같이해 이뤄진 김 부장의 공식 등장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게 정보당국의 분석이다.
본래 장남 김정남을 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그녀가 김정운의 후견인을 맡고 있는 것을 두고 조카들로 짜인 후계자 그룹에 대해 ‘대모’ 역할을 하는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이런 배경에서 김 부장은 오빠 김 위원장의 든든한 후원을 바탕으로 향후 북한 권력의 향방을 좌지우지할 인물로 꼽힌다. 절대권력자였던 아버지 김일성을 꺾은 고집에 오빠로부터 ‘믿을 건 혈육뿐’이란 독보적 신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 핵심계층 사이에서는 김경희 부장이 김일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성택 부장과의 결혼에 골인한 것으로 소문나 있다. 김 부장은 북한 최고의 명문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60년대 말 모스크바 유학을 하면서 같은 유학생이던 장 부장에게 빠지게 된다. 훤칠한 키에 미남형인 장 부장은 미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두 사람의 사이를 반대했다. 그리고는 장 부장을 강원도 원산 농과대학으로 전출시켜 버렸다. 그럼에도 불같은 성격의 김 부장은 틈만 나면 자신의 벤츠 승용차를 몰아 원산으로 향했고 장 부장과 밀애를 즐겼다. 결국 두 사람은 스물여섯 살이던 1972년 결혼에 골인했다. 김일성도 어쩔 수 없었는지 장 부장에게 출세가도를 달리게 했다.
네 살 위인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장 부장에 대해 두터운 신임을 내비치고 있다. 2003년 10월 직권남용과 부하직원의 부패 등 책임을 물어 좌천되기도 했으나 3년 뒤 복권시킨 것. 김경희 부부는 지난 2006년 8월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딸 금송이 스물아홉의 나이에 자살한 사건으로 한동안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김 부장이 알코올중독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나돈 것도 이때를 즈음해서다.
▲ 성혜림(맨 위 사진) 김옥(가운데 사진) 고영희(맨 아래 사진) | ||
김정운의 생모인 고영희(사망)는 후계체제가 성공적으로 구축됐을 때 가장 각광받을 인물이다. 7년 전 프랑스에서 암 치료 중 사망한 고영희는 한때 국모로 추앙받는 자리에까지 가기도 했다. 2002년 당시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고영희의 장남 김정철과 관련, 북한 군부는 ‘존경하는 어머님’이라고 그를 부르도록 하는 강연자료를 발간하기도 했다. 김정철이 호르몬 이상으로 후계에서 낙마하면서 잠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으나 이번 김정운의 후계 내정으로 사후지만 재차 ‘후계자의 어머니’ 반열에 오르게 됐다.
후계자 지위에서 밀려난 뒤 주로 해외로 떠돌고 있는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사망)은 비운의 여인 중 한 명이다. 성혜림은 1960년대 말 북한의 유명한 배우였다. 1969년 영화 <안개 흐르는 새 언덕>의 주연으로 프놈펜 영화축전에 참가할 정도였다.
그녀는 원래 소설 <땅>으로 유명한 월북작가 이기영의 맏며느리였다. 고교생 김정일은 이기영의 차남인 이종혁과 어울렸다.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친구의 집에 드나들던 김정일은 이종혁의 형수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 이종혁의 형수가 바로 성혜림으로 김 위원장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김 위원장은 성혜림을 얻기 위해 이혼수속을 밟게 한 뒤 몰래 살림을 차렸다. 이 충격으로 성혜림의 남편 이평은 자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얻었다. 그가 바로 한때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김정남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반대로 정식 결혼을 하지 못한 그녀는 ‘황태자의 동거녀’에 머물러야 했다. 게다가 1970년대 중반 북송 재일교포 출신인 무용수 고영희에 빠진 김 위원장이 그녀를 멀리하면서 서방세계에 머물렀고 한때 망명설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2002년 7월 심장병 치료를 위해 머물던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지켜보는 가족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도 김정일 위원장의 득세 이후 불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 위원장은 자신의 후계구도가 굳혀진 1980년대 여성동맹위원장이던 김성애를 축출했다. ‘여사님’이라 불리던 호칭을 없앴고 공식행사장에서 자리를 빼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생모인 김정숙을 ‘불요불굴의 혁명투사’로 치켜세운 것과 대조적이다. 김성애가 김일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김평일 폴란드 대사는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동구권 지역을 떠돌고 있다.
김성애의 딸 김경진 역시 북한 땅을 밟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대사인 남편과 함께 빈에 머물고 있다. 일각에서는 군 복무경력이 있는 김평일 대사가 군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득세할 경우 김성애가 복권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그렇지만 이미 김정운으로의 후계구도가 잡혀진 상태에서 실현되기 쉽지 않을 것이란 반론이 만만치 않다.
김정운 후계구도의 청사진이 막 제시된 북한 권력 내부를 두고 북한 전문가들은 ‘폭풍전야의 고요’라고 진단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린 자신의 아들에게 안정된 권력을 물려주기 위해 대대적인 인적 청산을 벌일 것이란 점에서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김정일은 후계자로 자리를 굳힌 1980년대 자신의 권좌를 넘볼 우려가 있는 김성애 세력과 삼촌 김영주(김일성의 동생)를 철저히 견제하고 무력화시켰다”며 “후계자 김정운을 둘러싸고 평양 로열패밀리 내부에 또 다시 피의 숙청바람이 불 가능성도 있다”고 귀띔했다.
김성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