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상 마약운반을 다룬 영화 <마린보이>의 한 장면. | ||
당시 마약단을 고발했던 한국인 선장 김철수 씨(가명·51)는 그후 어떻게 됐을까. 안타깝게도 김 씨는 그동안 거의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해오다 얼마 전에야 겨우 자리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브라질 현지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귀국한 그는 국가로부터 기대했던 보상은 물론 신변보호도 받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낮에는 뱃일을 하고 밤에는 선상에서 새우잠을 자던 그에게 우연히도 복권에 당첨돼 새삶의 발판을 마련된 것이다. 아직도 국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버리지 않고 있는 김 씨를 만나보았다.
브라질 수리남 등지에서 선장일을 하던 김 씨는 2005년 8월 중순경 교포 A 씨로부터 정글에서 캐낸 광석을 세네갈까지 운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례금만 10만 달러(약 1억 원)를 주겠다고 했다. 광석 운반에 그만 한 돈을 준다는 말이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재중동포 2명과 100톤급 운반선을 준비한 김 씨는 그해 9월 1일 약속한 장소로 가기 위해 돛을 올렸다. 5일 후 접선지에서 수리남인 1명과 콜럼비아인 2명을 태웠다. 그들은 “하루만 더 가면 물건을 싣기로 한 장소가 있으니 거기서 물건을 받은 다음 세네갈로 이동하면 된다”고 했다.
9월 7일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아와 6~7차례에 걸쳐 큰 상자를 바다에 떨어뜨렸다. 콜롬비아인들이 보트로 상자를 옮겨 실었다. 그러나 화물을 배로 함께 옮긴 김 씨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과정에서 파손된 상자 틈새로 보인 물건이 심상치 않았던 것. 얼핏봐도 광석은 아니었다. 아니 코카인이 분명해 보였다. 배에 적재된 코카인은 모두 1200kg(약 360억 원어치)이었다.
김 씨는 “코카인을 운반할 순 없다”고 마약운반자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너도 이제 공범이다”라며 되레 협박했다. 김 씨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배가 출항하면서부터는 마약조직에서 작은 배를 띄워 뒤따르며 감시하고 있었다.
김 씨는 재중동포 2명과 탈출을 결심했다. 그는 “눈 딱 감고 운반만 해주면 10만 달러를 벌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양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었고 잘못하면 평생 마약조직에 코가 꿰일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때마침 폭풍이 몰려왔다. 뒤에서 쫓아오던 작은 배도 폭풍에 떠밀려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김 씨 등은 격투 끝에 함께 타고 있던 콜롬비아인 마약 조직원을 제압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배를 장악한 김 씨 일행은 재빠르게 남미의 한 해역으로 이동, 한국대사관에 연락을 취해 “1200kg의 마약을 싣고 있으니 신변보호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대사관의 지시에 따라 브라질 포르탈레사 항구에서 인터폴 수사관들을 만난 김 씨는 브라질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됐다.
김 씨의 신변을 인계받은 대사관과 국정원 직원들은 “당신은 영웅이다. 한국에 들어가면 보상이 있을 것”이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얼마 후 김 씨는 현지에서의 생활터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검찰은 귀국한 김 씨에게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대검찰청 마약조직범죄수사부는 “브라질에서 재판기록을 넘겨받으면 법무부에 보상신청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김 씨는 당연히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 돌아온 검찰의 답변은 “국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법무부 규정상 보상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현재까지도 “브라질 정부에도 신청을 했지만 브라질은 마약 신고 포상 제도가 없다고 한다. 사정은 딱하지만 형평성 면에서 김 씨에게만 규정에 없는 보상금을 주긴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보상이 물거품이 된 뒤 김 씨는 절망에 빠졌다. 김 씨는 국내에 아무 연고도 없었다. 87년 원양어선을 타고 고국을 떠난 뒤론 20여 년간 단 한번도 귀국한 적이 없었다. 부모도 친인척도 없었기 때문에 돌아올 이유도 없었다. 무일푼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경제적 고통이 가장 컸다. 수리남에서는 한 달에 3000달러를 받고 선장으로 일했던 그였지만 한국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수리남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자신이 고발한 마약 조직이 완전소탕되지 않는 이상 수리남은 그에겐 죽음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언제 총을 들이댈지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남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기도 했다.
이후의 한국 생활은 악몽과도 같았다. 3년간 떠돌이 생활을 했다. 비록 한국이었지만 마약 조직의 보복이 두려워 신분증조차 만들지 않고 지냈다. 한국에서 다시 선장 일을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배를 구입할 돈이 없었다. 그러나 김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선상 일뿐이었다. 김 씨는 낮에는 화물선을 타고 청소 용역으로 일하고, 밤에는 선상에서 잠을 자는 바다의 노숙자 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영웅’ 같은 삶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지옥같은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날 김 씨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지난해 추석 전에 로또 복권을 우연찮게 구입했다가 2등에 당첨된 것. 큰돈은 아니었지만 김 씨에겐 삶의 전기를 찾을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선물이었다.
여관방에서 추석을 쓸쓸히 보내다 당첨 사실을 알게 됐다는 김 씨는 당시를 “조국에 돌아온 이후 유일하게 기쁨을 맛봤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씨는 이 돈으로 대전의 한 지역에서 횟집을 차렸다. 그는 “내가 선장 출신이라 횟감을 고르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며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생활은 팍팍하다고 전했다. 특히 지금은 여름이라 회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고민이라고 했다.
김 씨는 악몽과도 같았던 한국에서의 지난 4년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김 씨는 기자에게 “기사를 쓰더라도 그때 일을 너무 상세하게 쓰지는 말아달라”며 “그 기사를 보면 다시 악몽 같은 한국에서의 생활이 떠오를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씨는 “당신의 큰 용기를 국가가 보상해 줄 것”이라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던 국정원 직원의 말이 여전히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고 했다. “국가에 도움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조국은 나를 버렸다”고 외치던 김 씨는 아직도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