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체격과 주먹, 배짱 하나로 불과 17세 때 지역을 평정, 40년 이상을 주먹세계에 몸담으며 이름을 날렸던 조 씨는 수 년 전부터 신앙에 귀의, 제2의 삶을 살아왔다. ‘주먹’ 하나로 세상을 살아온 조 씨는 평생의 동반자 박경자 씨(70)의 간곡한 뜻에 따라 어두운 과거를 털어버리고 전국의 대학교와 교도소, 소년원 등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상담을 하는가 하면 ‘현역시절’ 거느린 ‘아우’들 및 중고등학교 일진회 멤버들의 교화에 앞장서왔다. 화려함 뒤에 숨겨진 조직의 어두운 실상과 조폭들의 비참한 말로에 대한 조 씨의 생생한 증언은 이들에게 적잖은 교훈을 주곤 했다.
그래서일까.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주먹세계에서 조 씨는 현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먹들을 두루 아우르고 중재시킬 수 있는 ‘큰 형님’으로 통했다. ‘족보’에 상관없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실제로 조 씨는 ‘은퇴’ 후에도 말 한마디로 전국의 주먹 수천 명을 집결시키는 막강한 파워를 자랑해왔다. 그래서 그가 주관하는 행사나 연회장에는 수천 명의 ‘어깨’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지역 경찰이 출동, 비상사태에 돌입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또 그가 주례를 선 아우들만도 2000명이 넘는다는 사실은 그의 녹슬지 않은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조 씨가 목사안수를 받은 후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다는 사실이다. 조 씨는 홍성에 자신의 소유로 된 1만여 평의 대지를 헌납, 은퇴한 원로목사와 오갈 데 없는 무임목사들을 위한 ‘목회자 안식의 집’으로 사용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조 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젓갈공장이나 차리고 노후를 대비해 별장용으로 쓸까해서 마련해둔 땅이다. 교회 권사인 아내는 내 뜻에 동조했지만 사실 적잖은 금액이라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지난날을 참회하는 뜻에서 물욕을 버리기로 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지난 14일 소식을 듣고 달려간 충남 단국대 천안병원에 있는 그의 장례식장은 수많은 조문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에도 조문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그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말해주듯 장례식장엔 입구부터 안쪽까지 어림잡아 1000여 개의 화환이 들어차 있었다.
갑작스런 죽음 때문인지 가족들은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조 씨를 변화시킨 부인 박경자 씨는 큰 충격에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해 주변의 안타까움을 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박 씨가 전한 상황은 이렇다.
▲ 조일환 씨 장례식장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악천후에도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조 씨의 동생은 “평소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셨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실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병원에 실려올 때부터 의식이 없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했죠”라며 말끝을 흐렸다. 조 씨와 깊은 친분이 있는 A 씨는 “그저께 통화할 때만 해도 정정하셨고 며칠 후에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었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애통해했다.
조 씨의 사인은 간암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가족과 지인들은 “고혈압과 당뇨, 협심증 등이 있긴 했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투병 중인 것도 아니었고 입원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조 씨는 일흔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체력을 자랑해왔다. 앉은 자리에서 생선 수십 마리를 먹어치웠다던 왕년의 식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는 110kg이 넘는 거구를 유지할 정도로 왕성한 식성을 보여왔었다. 또 수시로 서울과 천안, 전국 각지를 오가며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해왔다. 과거 수감생활 때 고혈압과 당뇨, 협심증으로 건강이 악화된 적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보니 혈압도 정상으로 됐고 예전의 건강을 되찾았습니다”라며 건강에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형사로 근무할 당시 조 씨와 맺은 인연을 계기로 조 씨를 측근에서 지켜보고 독려해왔던 이덕일 목사도 “워낙 술을 좋아하시고 많이 드셔서 간이 좋지는 않았지만 간암은 처음 듣는 얘기다. 그 정도로 위중했다면 고통이 상당했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며 “과로가 누적됐던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06년 ‘낙화유수’ 김태련 씨에 이어 또 한 명의 ‘큰 어른’을 보내는 한국 주먹계의 슬픔은 커 보였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