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은 휴가라고 해서 해외로 나가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정부가 금융위기를 맞아 어려운 국내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내 여행을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이미 휴가를 국내 여행지에서 보내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각 부처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들에게 국내 여행을 권장하고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7월 8일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행정안전부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여름휴가를 국내에서 보내자는 캠페인을 하고 있는 것을 칭찬하고 “관광공사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홍보를 해달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게다가 각부 장관들이 휴가를 국내에서 보내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해외여행을 하기는 어렵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여름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낼 것으로 알려졌다. 12일 업무차 제주도를 찾을 예정인 한 총리는 이후 13~14일 제주에 계속 머물며 여름휴가를 보낼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위기 파도와 싸워온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휴가인 3일부터 5일까지 사흘간 별다른 일정 없이 자택에서 휴식을 가졌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이나 이만의 환경부 장관도 휴가 기간에 특별한 일정이나 여행 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목 디스크 수술을 받은 점을 고려해 격한 운동보다는 평소 즐기는 자전거를 타고 인근 산을 찾았다. 또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직을 맡은 뒤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 만나는 시간도 가졌다.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휴일을 포함한 나흘간(7∼10일)의 휴가일정 중 이틀만 가족과 집에서 보내고 나머지 이틀은 농가체험을 할 예정이다.
일부 장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장관들 휴가가 2∼3일 정도에 불과하다보니 각 부처의 국·과장들의 휴가도 3∼4일에 그친다. 휴가에서 복귀한 장관이 언제 찾을지 모르는데 휴가라며 자리를 비우기 쉽지 않은 탓이다. 이러한 정부의 국내 여행 독려와 장관들의 휴가 장소와 일정 등 때문에 공무원들은 휴가를 국내에서 보낼 수밖에 없다.
정부과천청사의 한 공무원은 “7월은 임시국회가, 9월에는 정기국회가 열리기 때문에 실제 제대로 여름휴가를 쓸 수 있는 때는 8월이 전부다. 8월에 휴가가 몰리다 보니 기업들처럼 일주일씩 쉬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면서 “휴가를 쓸 수 있는 날짜가 짧아서 해외는커녕 제대로 된 국내 여행을 다니기도 어렵다.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집에서 쉬거나 인근 산에나 올라갔다 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다 개각설 때문에 요즘 관가에서는 ‘8월이 아니면 휴가는 물 건너갔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현재 윤증현 장관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든 상태다. 장관이 바뀌면 인사청문회 준비에 시간을 보내야 하고,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하면 새로운 장관에 적응하느라 자리를 지켜야 하는 공무원들로서는 8월이 유일하게 휴가가 가능한 달인 셈이다.
모처럼만에 휴가를 받더라도 정부의 지시사항은 끊임이 없다. 실제 해마다 휴가철이면 지방에 내려가서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라는 지시 아닌 지시가 내려진다. 이번 휴가철에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홍보대상이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지난 7월 말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가진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공직자들이 휴가기간을 녹색성장의 중요성이나 필요성,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왜 해야 하는지 등 정부정책의 내용을 국민들에게 소상히 알리는 기회로 삼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지난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께서도 휴가기간 중에 국민들에게 정부 정책을 잘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셨다”고 말했다.
이러한 제약과 정부의 지시에도 맘 놓고 여름휴가를 떠날 수 있는 부처는 그나마 다행이다. 노동부는 여름휴가 자체가 물 건너간 분위기다. 7월부터 터진 비정규직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면서 비정규직 담당 국장 등 일부 실·국장 등은 휴가를 가을로 연기했다. 또 쌍용차 사태 등도 노동부 공무원들의 발목을 잡았다.
국세청도 최근 취임한 백용호 국세청장 체제에 적응하느라 여름휴가 돌입이 늦어진 상태다. 백 청장이 “적당히 쉬어줘야 일에도 능률이 오르니 업무에 차질이 없는 선에서 직원들 휴가를 챙겨줘라”고 당부했지만 내부 인사가 잇달아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다. 실제 차장과 서울지방국세청장에 이어 국·과장, 신임 세무서장 인사가 막 끝났고 조만간 적지 않은 규모의 사무관 전보인사도 이뤄질 것으로 알려져 직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검찰은 김준규 검찰총장 내정자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데다 간부급 인사마저 코앞으로 다가와 휴가를 가려야 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처럼 공무원들이 제대로 휴가를 가지 못하자 최근 정부는 공무원들의 휴가사용 독려를 위해 연가보상비 제도를 없애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혀 공무원들의 속을 더 쓰리게 하고 있다. 자칫 휴가도 못 가고 돈도 못 받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준석 언론인